[리뷰] 유예된 인생에 지쳤다면… 『GV 빌런 고태경』
[리뷰] 유예된 인생에 지쳤다면… 『GV 빌런 고태경』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5.07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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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우선 영화 잘 봤습니다. 그런데 콘티는 그리고 촬영했습니까? 콘티 없이 찍은 것 같은데요? 컷들이 튀지 않습니까. 시선도 안 맞고.” 
모든 영화관 GV(관객과의 대화) 현장마다 찾아다니며 감독에게 창피를 주는 베레모 차림의 50대 남자 고태경, 일명 ‘GV 빌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을 담은 이 소설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꿈만을 바라보며 유예된 인생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소설은 두 명의 유예된 인생을 그린다. 감독이 갑작스럽게 빠지게 된 영화에 들어갔다가 부족한 시간과 재원으로 인해 영화를 망쳐버리고 일이 끊긴 30대 영화감독 조혜나. 그리고 한때 촉망받는 영화인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수십 년간 영화를 찍지 못한 GV 빌런 고태경. 둘은 캐릭터가 정반대이지만, 모두 영화를 지독히 사랑하며, 너덜너덜해진 삶 속에서도 언젠가는 자신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두 유예된 인생에게 세상은 설 자리를 내주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하며 깎아내린다. 이들에게 무엇보다 힘든 것은 유예된 인생이 힘들어 포기하거나 엇나가버린 가까운 사람들이다.  

“영화는 내게 좋은 것만 줬는데. 영화가 나한테 상처를 준 게 아닌데. 영화가 미워지고 극장도 안 가게 되더라. 영화도 밉고 나도 밉고.” 혜나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변변한 영화를 만들지 못해 지쳐버린 승호는 영화를 관두고 바이럴 광고일을 한다. 계속 영화일을 하게 되면 그토록 사랑하던 영화가 싫어질까 봐서다.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데, 세상의 인정조차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을 왜 계속해나가겠어? 보상심리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삶을 응원할 수 있어, 너?”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했던 윤미 역시 영화를 포기하게 되고, 더 나아가 영화를 조롱하는 유튜버가 된다. 

“우리는 각자가 원하지 않는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잘하고 싶었는데,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콘티도 열심히 그렸는데, 우리는 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게 될까.”
“나는 생각하기 싫어도 나이 든 내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늙어가는 엄마 생각도 났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이렇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연이은 고난에 혜나는 궁여지책으로 고태경을 희화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재능이니 뭐니 하는 건 이십대에나 하는 거 아냐? 그냥 하는 거지. 이 나이 되니까. 재능 있다던 사람들 그만두고 재능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성공하는 것도 다 지켜봤어. 꾸준히 계속하는 의지야말로 진짜 재능이지.” 고태경은 재능이 없음을 한탄하는 혜나에게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자네는 내가 불행하다는 걸 전제로 이 영화를 편집하고 있지 않아?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고태경은 거의 불행의 아이콘이던데. 난 별로 불행하지 않은데.”
“소소한 기쁨의 순간들은 거의 없지 않아? 단팥죽을 먹는 순간이라든지.” 
“난 나름대로 나쁘지 않게 살고 있었다고. 그런데 자네가 내 인생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나서부터 몹시 불편해졌어. 자네가 나를 패배자라는 렌즈로 보니까.” 

유예된 인생을 그저 불행으로만 인식하던 혜나에게 고태경은 유예된 인생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황리에 마친 다큐멘터리 ‘GV 빌런 고태경’의 GV에서 고태경의 말에 이 소설의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GV 빌런 고태경』
정대건 지음│은행나무 펴냄│264쪽│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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