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어둠 속에서 홀로 틔운 싹: 최영숙,「감자싹」
[시민 시인의 얼굴] 어둠 속에서 홀로 틔운 싹: 최영숙,「감자싹」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4.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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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찬장 속에 박혀 있던

세 개의 감자에 싹이 났다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킨다는 감자싹의

성분은 솔라닌이다 물에 녹지 않아

호흡중추나 운동중추를 마비시킨다고 사전에는

씌어 있다 햇빛도 양분도 없는 곳에서

감자는 어떻게 싹을 틔울 마음이 들었을까

슬픔도 때로는 힘이 된다.

침묵도 어느 땐 필요한 법이다, 그런 것이었을까

비죽이 솟은 노란 싹이 꼭 뿔 같다

제 몸에 뿌리를 박고라도 번식하고 싶은 발아 그 슬픈 정수리

무엇을 찌를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는

내 마음이 나쁘다 이를테면 찬물에 온통 머리를 쳐박아도

빠지지 않는 사랑 같은 것 추억 같은 것

다 잊어도 나만은 안 잊는다 그런,

잊혀지고 낡아진 꿈을 밀어올리느라 품게 된

독 같은 것 질겨진 혓바닥 같은 것……

감자싹을 도려내는 손길이 아리다

깜깜중에도 눈뜨고 싶은 덩굴 속마음, 내가 너를 버리다니

사랑 평화 그리움 무엇보다 손 뻗어 잡아보고 싶은 푸른 하늘

주섬주섬 싹눈을 주워 흙에 옮긴다 잘 자라 다시 만나자

-최영숙,「감자싹」

어둠 속에서 홀로 틔운 싹

우리 시 문학에서 여성 시인의 계보를 따진다면 최영숙 시인에게 한 줄기 흐름이 닿습니다. 여성적 감성 또는 여성주의적 면모를 독창적으로 시에 담은 시인입니다. 최영숙은 고정희 시인의 제자입니다. 고정희가 또 다른 영역을 향해 나아간 선구자로서 최영숙이 그 길을 따랐음은 분명하지요. 고정희는 마흔셋 젊은 나이에 지리산 자락에서 계곡물에 휩쓸려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최영숙 또한 같은 나이에 루푸스병으로 요절했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닮는 것일까요. 지리산은 고정희에게 모태와 같은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으니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루푸스병도 내 몸을 지키는 면역 체계가 제 몸을 공격하는 불치병이라 하니 최영숙의 삶 또한 고정희의 운명을 따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 「감자싹」은 멈춰 버린 사랑의 노래입니다. 싹 난 감자는 쓸모없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관심이지요. 시심은 그것을 포착해서 드러냈습니다. 캄캄한 곳에 갇혀 “어떻게 싹을 틔울 마음이 들었을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어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외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과 감자는 그렇게 서로 통했습니다. 무관심과 외면은 슬픔을 낳았습니다. 그 슬픔이 싹을 밀어 올렸습니다. 나 여기 있다고 손짓하기까지, 감자가 싹을 틔우기까지, 시인이 자기를 발견하기까지 오랜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감자는 누구든 먹기만 해 봐라 탈 나게 하리라 독기를 품고 있었고 시인은 떠난 사랑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자학하며 혹시 다시 사랑이 시작되면 독설을 퍼부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아무도 없습니다.

시인의 슬픔은 이 공허함 때문입니다. 사랑이 남긴 것이 다 이렇다고 감자 싹을 보며 도리질합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유행가처럼 얘기해 버리고 말 일이지만 시인은 이 순간 자신의 자리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감자와 일체화를 이루던 곳에서 벗어나 전지적 시점으로 옮겨 갑니다. 어느새 시인은 감자 싹을 도려내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 변신의 위상학은 참으로 최영숙다운 면모라 할 수 있습니다. 생활인의 모습입니다. 사랑 때문에 고립되었고 슬픔에 잠겼지만 그러한 감정에 싸여만 살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랑은 완성된 것이라 봅니다. 그렇기에 버려진 감자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재생할 것을 결심합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랑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실천이 멈췄을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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