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사는 그책] 당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소설이라면?
[니가 사는 그책] 당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소설이라면?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12.09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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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다(buy)는 말에 어쩐지 산다(live)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어쩌면 책을 사면서 그 책에 들어가 살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존 버거가 “이야기 한 편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보는 게 된다”고 말했듯 말이다.
책을 산다는 행위가 그저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를 넘어선다면 우리는 그 구매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니가 사는 그책. 어느 가수의 유행가 제목을 닮은 이 기획은 최근 몇 주간 유행했던 책과 그 책을 사는 사람들을 더듬어본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우리 인생이 누군가가 쓰는 소설이라면? 프랑스 소설가 기욤 뮈소의 신작 『인생은 소설이다』는 이런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한다. 

소설은 플로라 콘웨이라는 소설가가 집안에서 3살배기 딸과 숨바꼭질을 하던 중 딸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집 안 곳곳을 뒤져봐도 아이는 없고, 당시 아이가 스스로 집밖에 나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는데도 아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추리소설가들이 소위 ‘밀실 사건’이라고 일컫는 일이 벌어지자 콘웨이는 딸을 잃은 슬픔에 6개월 동안 가슴앓이를 한다. 그리고 너무나 허무하게도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속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기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눈 채 그녀는 말한다. 

“앞으로 3초를 줄 테니 어디 한번 나를 말려보시지. 하나, 둘, 셋….” 그러자 놀랍게도 현실에서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던 로맹 오조르스키가 그녀 앞에 당황한 기색으로 나타난다. 여태 숱한 소설을 써왔지만, 소설의 등장인물이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서 움직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오조르스키를 마주한 콘웨이의 마음을 상상해보자. 가령 ‘순이’라는 작가가 당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고 있다면 어떨까. 일단 조금 안심하지 않을까. 당신이 주인공이니까. 보통 소설에서 주인공은 잘 죽지 않는다. 아무리 해결하기 힘든 난관에 봉착해도 초자연적 인물이 출연해 도움을 주거나 기상천외한 사건이 발생해 꽉 막힌 현실을 타개해준다. 극적 반전이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문학 작품에서 해결이 불가능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사건을 끌어들이는 플롯 장치)가 해결 불가능해 보이던 순간을 바꿔놓기도 한다. 

당신은 또한 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기욤 뮈소가 말했듯이 성공적인 소설이란 성공적인 연애담과도 맥이 닿아있으니까. 당신은 원하는 순간에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증발해버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에게서 준비된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 작가가 당신의 미래에 필연적인 만남을 마련해 놓았을 테니까.  

당신은 어쩌면 펼쳐지는 사건들 틈에서 모종의 의미를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한 기묘한 무언가, 비현실적인 무언가에서 깊은 사유를 끌어낼지도 모른다. 그 무언가가 작가가 의도한 장치일 수도 있으니까. 

이렇듯 지금 내 인생이 누군가의 소설이라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작가의 뜻대로 움직인다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듯 마음이 초연해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한낱 작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인가. 만약 내가 작가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면 극적으로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다고 해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해서 거기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인생은 애초에 나의 것이 아니니, 너무나 허무하지 않을까. 

그러나 소설의 결말부에서 작가는 이러한 허무감을 반전한다. 현실에서는 콘웨이가 오조르스키의 소설 속 등장인물이지만, 한편으로 오조르스키 역시 콘웨이가 쓰는 소설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오조르스키가 곧 콘웨이의 일부이며, 콘웨이 역시 오조르스키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작가는 결국 ‘인생이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각자 신의 일부인 이상 허무주의에 빠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는 ‘나를 짓는 자유’라는 표현을 씁니다. ‘나’라는 인간을 어떤 인간으로 만드는 주체는 ‘나’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만드는 객체로서의 ‘나’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만드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입니다. 내가 나를 짓지 않습니까. 나로부터 지어지는 것도 나고요. 이것이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인 까닭입니다.” 인생=소설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오늘 당신이 짓는 인생의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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