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사는 그책]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출판계 미스터리
[니가 사는 그책]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출판계 미스터리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11.25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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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다(buy)는 말에 어쩐지 산다(live)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어쩌면 책을 사면서 그 책에 들어가 살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존 버거가 “이야기 한 편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보는 게 된다”고 말했듯 말이다.
책을 산다는 행위가 그저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를 넘어선다면 우리는 그 구매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니가 사는 그책. 어느 가수의 유행가 제목을 닮은 이 기획은 최근 몇 주간 유행했던 책과 그 책을 사는 사람들을 더듬어본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난 2001년 일본에서 발표한 단편 소설집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이 최근 국내 출간돼 인기를 끌고 있다. 책의 제목을 ‘추리소설가 살인사건’이라고 바꿔도 좋을 정도로, 작가는 소설 속 추리소설가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사라지게 하거나 죽게 한다. 그런데 추리소설가들에게 해를 가하는 ‘범인’들이 흥미롭다.

「세금 대책 살인사건」에서 작가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세금이다. 소설이 소위 대박이 나서 뜻밖의 큰돈을 만지게 된 작가는 그 돈을 펑펑 써버린다. 돈을 쓴 것까지는 좋았으나, 세금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내년 봄에 내야 하는 세금 액수가 적힌 종이를 받아든 작가의 아내는 혼절하고, 작가는 어떻게든 세금을 줄이기 위해 그동안 구매한 물건들을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그 물건들이 ‘경비’로 처리돼 세금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당연히 엉망이 됐고, 작가는 이후 어떤 출판사로부터도 연락을 받지 못한다. 히가시노는 결과적으로 이 소설에서 돈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고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을 비꼰 것이다. 

「장편소설 살인사건」에서 작가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독자들이다. 소설에서 “좋은 작품을 계속 쓰면 언젠가는 팔릴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한 출판사 편집자는 “안일한 생각”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그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는 읽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리고 독자에게 읽히려면 일단 대장편이어야 합니다. 두꺼운 책이어야 합니다.” 독자들이 점점 엄청난 두께에 ‘대작’이라는 딱지가 붙은 책만을 산다는 것이다. 결국 책을 팔기 위해 작가는 짧게 써야 할 내용을 장황하게 늘리고, 편집자는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그 무게가 8.7kg에 달하는 소설을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히가시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책의 가치를 평가할 줄 모르는 독자를 비판한다.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에서 작가는 죽음을 자초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여러 출판사에 신간 출판권을 주기로 약속해놓고 도통 원고를 내놓지 않다가 어느 날 네 개 출판사 직원들을 자신의 집으로 부른다. 그리고 한 추리소설 속 범인을 맞추는 직원에게 신간의 출판권을 주겠다고 말한다. 결국 한 직원이 범인을 맞추지만, 작가는 신간을 내놓지 않는다. 작가가 직원들을 부른 이유는 단지 그 소설의 범인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말한다. “자네들은 그저 얌전히 기다리면 그만이야. 베스트셀러 작가는 신이라는 걸 잊지 말게. 알았으면 빨리 나가.” 결국 화가 난 한 직원이 작가를 살해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독자는 이런 질문을 마주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어째서 신이 됐을까?’ 그 이유는 독자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들만 구매하기 때문 아닐까.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에서 작가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고령화’다. 소설 속 한 출판사 편집자는 치매에 걸린 소설가에게 계속해서 소설을 의뢰한다. 당연히 소설가의 소설은 말이 되지 않고 이전 소설들과도 그 내용이 비슷하지만, 편집자는 작가의 작품을 손수 고쳐서 연재한다. “그런 걸 책으로 만들어도 되나요?”라는 출판사 직원의 질문에 한 직원은 이렇게 답한다. “괜찮아 어차피 독자도 전작 같은 건 다 까먹으니까. 어차피 독자 평균 연령이 76세야.” 고령화 사회에서는 작가도, 독자도, 좋은 작품도 점점 사라져 간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 「독서 기계 살인사건」에서 작품의 ‘범인’은 책을 읽고 요약하고 비평까지 해주는 ‘쇼혹스’라는 이름의 기계다. 책 읽기를 귀찮아하는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이 기계를 이용하게 되고, 급기야 작가들은 독자가 아닌 쇼혹스의 ‘입맛’에 맞는 소설을 써내기 시작한다. 

히가시노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요미(쇼혹스 판매자)와 동료들은 진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세상에 느긋하게 책이나 읽고 있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다. 책을 읽지 않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 책을 좋아했던 과거에 매달려 있는 사람, 자신을 살짝 지적으로 보이고 싶은 사람 등이 서점에 드나들 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책을 읽었다, 는 실적뿐이다. 기묘한 시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주제에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책이 그리 팔리지 않는데도 베스트셀러 탑텐이 발표된다. 일반 독자가 전혀 모르는 문학상이 늘었다. 책이라는 실체는 사라지는데 그것을 둘러싼 환상만은 아주 요란하다. 독서란 도대체 뭘까.” 

한편, 히가시노의 소설들은 보통 세 부류로 나뉜다. 『백마산장 살인사건』과 같은 이른바 ‘본격 추리물’과 『백야행』이나 『몽환화』 같은 ‘사회파 추리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녹나무의 파수꾼』 같은 ‘휴먼 드라마’.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은 그가 써온 다른 소설들과 다르다. 다른 소설들의 종착지가 ‘범인 찾기’, 혹은 ‘미스터리 정체 확인’이라면 이 작품은 세태 풍자가 그 목적지다. 20년 전에 발행된 소설집이지만, 어쩐지 오늘날에도 적용될 법한 풍자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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