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사는 그책] ‘유해한 남성성’을 쫓는 깊은 시선
[니가 사는 그책] ‘유해한 남성성’을 쫓는 깊은 시선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7.08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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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다(buy)는 말에 어쩐지 산다(live)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어쩌면 책을 사면서 그 책에 들어가 살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존 버거가 “이야기 한 편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보는 게 된다”고 말했듯 말이다.
책을 산다는 행위가 그저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를 넘어선다면 우리는 그 구매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니가 사는 그책. 어느 가수의 유행가 제목을 닮은 이 기획은 최근 몇 주간 유행했던 책과 그 책을 사는 사람들을 더듬어본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만약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뤘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 쉽지 않았을 해피엔딩을 말이다.”  

정세랑 작가의 신작 소설 『시선으로부터』가 인기몰이 중이다. 이 소설은 심시선이라는 여성 예술가가 이룬 일가(一家)를 그린 작품으로, 시선의 세 딸들과 아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남편들, 손주들이 시선의 10주기를 맞아 하와이에서 독특한 제사를 준비하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작가는 “보물찾기”라고 표현했는데, 소설의 형식 역시 ‘보물찾기’다. 하와이에서 심시선 일가는 뿔뿔이 흩어져 심시선을 추억하는 물건들을 모으고 제사 때 풀어놓기로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차별과 폭력의 20세기를 견디며 자신을 지켜온 시선이 가족의 마음속에 되살아난다. 

책은 시선이 당했던 차별과 폭력의 역사를 중심으로 엮인다. 작가는 이를 “유해한 남성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이 책을 꿰뚫는 주제다. 소설 속 유해한 남성성은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등에 칼을 꽂는 차별과 폭력이다.      

시선의 가족은 한국전쟁 때 국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국군과 경찰이 외려 잔인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이후 사진결혼(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들이 사진결혼을 통해 혼인하는 중매결혼의 한 형태)을 통해 하와이로 가게 된 시선은 쉴 틈 없이 일만 하다가 마티아스 마우어라는 독일 유명 예술가의 꾐에 빠져 독일에 가게 된다. 그러나 마우어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여성이자 동양인인 시선을 차별하고,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한다. 

자질을 알아봤다고,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해서 따라간 독일이지만, 시선은 학습보다는 잡일을 하고, 마우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면글면하게 된다. 마우어는 시선을 사람이 아닌 ‘오브제’로 취급하고, 시선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참지 못한다. 독일 예술계를 장악한 마우어에게 화가의 꿈을 꾸던 동양인 여성 시선은 노예처럼 휘둘리면서도 마우어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한 시선이 그에게서 도망치려 하자 마우어는 급기야 나이프를 던지고, 그에게서 독립한 시선이 전시회를 열자 시선의 작품을 사들여 동료들과 함께 비웃고 태워버린다. 마우어는 마지막까지도 폭력적이었는데, 모든 것이 시선 때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그의 자살로 온 유럽이 시선을 미워하게 된다. 

시선이 독일에서 당한 차별과 폭력은 요즘 말로 하면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이나 그루밍(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드는 등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이지만, 시선이 그가 당한 차별과 폭력의 정체를 온전히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마우어로 인해 유럽에서 살지 못하게 되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됐지만 시선은 굴하지 않는다. 한국으로 돌아와 글과 방송 출연을 통해 여성 인권 운동가로서 활약하고 이십여권의 책도 집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간다. 마우어에게 굴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를 비웃는 세상 앞에서도 시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시선의 일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런 시선을 추억한다. 시선이 당했던 차별과 폭력은 그들에게 아픔이라기보다는 자랑스러움이다. 그 많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결코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주 그렸던 게와 같이 단단하게 자신을 지켜낸 시선처럼, 일가는 유해한 남성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낸다. 가령 한 남성에게 염산 테러를 당했으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여론에 2차 가해까지 당한 시선의 손녀 화수는 시선의 책을 통해 용기를 얻는다. 마우어의 칼로 인한 시선의 흉터와 염산 테러로 인한 화수의 흉터는 이어진다. 손녀 해림은 인종을 차별하는 같은 반 아이와 싸운다. 시선이 과거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과, 해림이 새를 관찰하기 좋아한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시선의 아들 명준의 아내 난정은 아직까지 하와이를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흔적을 찾고 세계를 지배해온 유해한 남성성을 예민하게 쫓는다. 

결국 일가가 하와이에서 찾은 보물은 작가가 꼬집은 ‘유해한 남성성’에 반대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 보물들은 일가가 ‘시선으로부터’ 받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영혼이 어떻게 전파되는지, 그 위대한 확산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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