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대한민국] ‘영원한 이방인’ 홍세화 “이런 한국사회, 적응해야 하나요?”
[책 읽는 대한민국] ‘영원한 이방인’ 홍세화 “이런 한국사회, 적응해야 하나요?”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11.23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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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안경선 PD]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이제 좀 적응하셨나요?”
1999년, 20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그에게 한 라디오방송 진행자가 이렇게 묻자 그는 반문한다. “적응해야 하나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74)는 줄곧 적응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부적응의 시작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었다. 1974년 중앙정보부가 유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혁당 재건위’라는 가공의 단체를 조작해 관련자 여덟 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건. 그는 국가가 자행한 이 ‘사법 살인’에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일을 과제로 삼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전사”가 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는 그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일하던 중 졸지에 망명자 신세가 된다. 한국에서 ‘남민전 사건’(1979년 대한민국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이자 논란은 있지만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된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로 꼽히는 프랑스에서 그는 난민 신세로 동료들이 붙잡히고 고문당하고 쓰러지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프랑스와 그렇지 못한 대한민국. 그 인지 부조화는 멀미를 일으키기 충분했고, 홍세화는 이를 바탕으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1999)를 써낸다.         

이후 ‘국민의 정부’가 집권하고 밟은 한국 땅에는 그를 잡으러 온 중정 요원은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적응해야 하나요?”라고 되물어야 했다. 김포공항에 내려서 본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카피, 공중파 TV에 나온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 같은 광고카피. 그가 없던 20년 동안 한국은 물신주의(物神主義)의 늪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가 돼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다시 전사가 됐다. 한국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국 후 20여년 동안 자유를 향한 외침이 있는 곳에는 늘 홍세화의 목소리도 있었다. 언론인, 소수파 진보정당 대표, 시민단체인 등으로 활동하며 줄곧 약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연대했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2002) 『빨간 신호등』(2003) 『생각의 좌표』(2009) 등 그의 진보적인 생각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2015년에는 벌금형을 받은 사람 중에 벌금을 낼 형편이 못돼 교도소에 갇히는 이들에게 벌금을 빌려주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이 됐다. 그 덕에 지난 10월 기준 880여명이 벌금을 못 내 신체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다.      

올해는 다시 책을 통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11년 만에 펴낸 『결 : 거칢에 대하여』에서 그는 우리가 과거보다 더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있으며, 편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불의를 외면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지난 8월에는 세월호 참사 이후 6년 동안 <한겨레>에 쓴 칼럼을 엮은 책 『미안함에 대하여』를 펴냈다. ‘요행 덕으로 살아남았다’는 그의 부채감은 ‘학습 노동’을 하는 학생들, 성소수자, 난민, 이주노동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의 부자유(不自由)로 향했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가슴엔 불가능한 꿈을 안고, 갈 길이 멀더라도 계속 떠들 것이라는 그는 매일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라고 다짐한다. 모든 이들이 진정 자유로워질 때까지, 그는 전장에서 쓰러질 각오를 한다. 나뭇잎 사이로 듬성듬성 가을 하늘이 보이던 날, 한겨레 출판 사옥에서 여전한 ‘이방인’ 홍세화를 만났다. “질문이 재미있더라고요.” 이것이 그의 첫마디. 

[사진= 안경선 PD]

Q. <독서신문> 50주년 창간호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 명사로 선정되셨습니다. <독서신문> 독자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명사는 아닌데, 이렇게 선정돼서 영광이고요. <독서신문>은 옛날 타블로이드 판형일 때 봤습니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독서신문> 독자분들은 기본적으로 책은 많이 읽으시니까, 가능하면 글쓰기도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독서가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거라면, 글쓰기는 생각을 정리해주는 과정이거든요. 우리 생각은 사실 정리돼있는 것이 아니라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모호한데요. 책을 읽고 든 생각을 글쓰기를 통해 정리하는 과정을 거듭하면 우리 생각은 그만큼 더 정교해집니다.

Q.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홍세화 선생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A. 지금 독거노인 신세고요. (웃음) 두 아이와 처가 다 프랑스에 있거든요.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언어’가 프랑스어입니다. 생각하는 언어가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에 제 아이들은 프랑스인에 가깝죠. 제 처는 한국과 프랑스를 왔다 갔다 하는데, 코로나19가 터져서 못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독거노인의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혼자 있다 보니 게을러지고 건강도 나빠지는 것 같아서 요즘은 일산 호수공원이나 동네에서 만 보 걷기를 하고 있습니다.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 일과 ‘책 읽는 시민 모임’인 <소박한 자유인>의 대표 일도 하고 있습니다.             

Q. 책 읽는 시민 모임은 무엇인가요?

A. 책을 한 달에 한권씩 선정하고, 그 책을 주제로 토론하고, 저자를 초청해 세미나도 열고 하는 모임입니다. 석 달에 한 번은 책을 보내주고요. 회비는 한 달에 만원, 회원은 전국적으로 280명 정도, 그렇게 많지는 않죠. 기자님도 참여하시면 좋겠네요. (웃음)

Q. 회사원, 관광안내원,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이어 신문기자, 소수파 진보정당의 대표, 그리고 이제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을 맡고 있다고요.

A. ‘인권연대’라는 시민단체에서 ‘평화인문학’이라고, 교도소 안에서 하는 인문학 강의를 기획했었어요. 그런데 벌금을 못 내서 교도소에 온 분들이 꽤 많았던 거예요. 파악해보니 일 년에 사만명이 넘는 거예요. 벌금 300만원을 못 내면 30일 동안 교도소에 갇히는 거죠. 이 엄청난 상황을 인식하고, 인권연대에서 정치권에 벌금형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계속 요구해왔어요. 똑같은 벌금형이 돈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돈 없는 사람에게는 너무 가혹한 거니까요. 구체적으로는 수형자의 재산과 소득과 연동한 ‘일수 벌금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요청을 해도 국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은행을 만들어서 벌금 낼 돈이 없지만, 몸으로 때울 수도 없는 분들에게 돈을 빌려주자. 가령 집안에 보살펴야 할 가족이 있다든지 하는 분들이요. 그래서 신용 조회나 이자, 담보 없이 오로지 상황을 심사해서 벌금을 빌려주는 은행을 만든 거죠. 장발장 은행은 일종의 정치적 시위이기도 해요. 유럽에서는 일수 벌금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은행이 필요 없거든요. 하나의 예로, 핀란드 ‘노키아’ 부회장이 속도위반으로 1억원이 넘는 범칙금을 냈어요. 핀란드에서는 1931년부터, 독일에서는 1970년대부터 벌금을 재산, 소득과 연동하고 있어요.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의 벌금이 최대 5,000배 차이가 나요. 우리나라에서는 일수 벌금제를 못 하고 있는데, ‘정확한 재산이나 소득을 알 수 없다’는 이유를 대요. 저희가 보기엔 그저 핑계죠. 핀란드는 1931년부터 했는데 그들은 정확하게 파악해서 했을까요? 의지의 문제죠. 이런 데서도 한국 사회가 약자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Q. 선생의 일생 화두는 ‘자유’ 같습니다. 자유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한가요?

A. 저는 ‘나를 짓는 자유’라는 표현을 씁니다. ‘나’라는 인간을 어떤 인간으로 만드는 주체는 ‘나’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만드는 객체로서의 ‘나’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만드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입니다. 내가 나를 짓지 않습니까. 나로부터 지어지는 것도 나고요. 이것이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인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는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거죠.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가 속한 사회에 자기를 작용시켜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느끼는 일을 통해서 생존이 담보되는 사람’이 바로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대다수는 먹고사는 일 때문에 자아실현을 포기하게 됩니다. 노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노동의 결과물이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소위 ‘소외 노동’이라고 하지요.
한국사회는 자유의 개념부터 왜곡됐다고 생각합니다. 분단되면서, 또 전쟁을 치르면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라는 이분법이 생기고, 자유세계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가장 기본적인 몸의 자유부터 유린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고, 너무 많은 학살이 있었습니다. 자유세계를 공산세계의 대립물로 놓으면서 자유가 영업의 자유, 소비의 자유 정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유당, 민주자유당, 자유한국당 등 수구 기득권 세력이 자유를 내걸었습니다. 자유의 개념이 기득권 세력에 의해 왜곡됐고, 그들이 계속해서 그러한 자유를 표방했기 때문에 이른바 진보적인 사람들조차 정의, 민주, 평등은 추구하지만 자유는 찾지 않습니다.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안경선 PD]

Q. 지난 2월 11년 만에 책을 내셨습니다. 『결 : 거칢에 대하여』.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되기 위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를 짓기 위해 회의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A.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가장 확신하는 것조차 틀렸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거죠. 근대 철학의 시작점인 데카르트의 회의론은 천여년 동안 믿어왔던 명제들이 무너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를테면 카톨릭의 보편성은 종교개혁으로, 천동설은 지동설로 깨집니다. 옛날 사람들은 스페인이 지구의 끝이라고 믿었지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이 ‘생각한다’는 것은 곧 회의하는 것, 가장 확신하는 것에조차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결 : 거칢에 대하여』에서 강조한 점은 ‘생각’의 성질이 ‘고집’인데, ‘생각하다’는 말은 ‘회의하다’에서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과 ‘생각하다’는 서로 반대이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생각’만 주입받습니다. 주입식 암기교육.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특히 더 책을 안 읽는 이유 중 하나도, 대다수가 이미 자기가 완성된 의식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의 현상은 있지만 ‘생각고픔’의 현상은 없거든요. 생각의 성질은 애당초 ‘고집’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다’는 없이 ‘생각’만 주입받았으니 사람들이 열려있지 않고 고집불통인 거죠.                  

Q.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A. 자기 생각에 대해서죠. 내가 고집하고, 주장하는 생각, 그게 무엇이든 그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야 합니다. 자, 지금 갖고 있고 주장하는 생각, 그 생각 갖고 태어나셨나요? 어림도 없죠. 그렇다면 그 생각을 창조하셨나요? 말도 안 되죠. 그 생각 선택하셨나요? 이게 놀라운 상황입니다. 내가 지금 갖고 있고 고집하는데 그 생각이 내가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창조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내가 선택해서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근데 내가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그 생각을 막무가내로 고집하면서 살아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내가 고집하고 주장하는 생각은 어디서 왔나, 그리고 그 생각은 내 존재에 어울리는 것인가’예요.

Q. 책에서 우리가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한다고 적었는데요. 

A. 아주 간단한 질문 하나 합시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이야기하면서, 20:80의 사회라고 부르잖아요. 잘사는 20%와 못 사는 80%의 사람들. 그런데 민주주의(Democracy)의 의미는 ‘다중 지배’입니다. Demos(다중)와 Cratos(지배). 따라서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자 20:80의 사회라면 이론적으로는 80이 지배해야 하잖아요. 민주주의가 추구한 힘은 그런 것이지만,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존재는 80에 있는데 생각은 20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한 생각이 곧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의식을 고집해요. 왜 그럴까요? 생각의 성질은 고집이니까, 그리고 대부분이 회의하지 않으니까요. 
80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도록 하는 힘은 20이 갖고 있어요. 마르크스가 말했듯,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에요. 많은 이들이 존재는 80에 있는데 생각은 20으로부터 온 것을 갖게 되고, 그것을 막무가내로 고집하게 되지요. 이런 것들이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문제들이지요.

Q. 20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80에 속한 사람들에게 지배계급의 이념을 주입시키는 것인가요?

A. 80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려면 그렇게 해야 하니까요. 물론 20 중에서도 모두의 자유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이 지배, 권력, 소유, 욕망, 탐욕에 매몰되기 마련이지요. 그런 것들을 제한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죠. 

Q. 20년의 망명 생활 후 2002년 귀국해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라는 물음에 “적응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주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느낀다고요. 

A. 과거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에요. 한국 사회의 지나친 물신주의 가치관 때문이에요. 프랑스도 자본주의 사회니까, 프랑스인들도 돈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돈의 노예가 아닌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데 한국에는 돈의 노예가 아닌 사람이 너무 적어요. 아무리 돈이 좋아도 돈의 주인이어야지 돈의 노예가 되면 안 되잖아요. 인문학적인 소양이 일천하다고 할까. 이런 데서 오는 위화감이 있어요. 1999년 귀국할 때 소공동 전광판에 크게 ‘부자 되세요’라고 적혀있더라고요. 저는 이 말 앞에 뭐가 더 있는지 알았어요. 이를 테면 ‘마음의 부자 되세요’ 같은 문장인지 알았죠. 그러고 나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카피를 마주했죠. 인간이라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해요. 주거 조건이 열악한 사람을 여기 대입해보자고요. 이를테면 비가 새는 오두막이나 곰팡이 슨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다시 광고카피를 읊어봅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이게 야만인 거예요.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있다면 이런 광고카피는 광고효과를 낼 수 없지요. 유럽에서는 이런 광고카피는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어떻게 이따위 광고카피를 내냐는 거지요. 물신주의가 쌓이다 보니 요즘 초등학생들이 휴거(임대주택에 사는 거지)니 200충(한 달에 200만원 버는 벌레)이니 300충(한 달에 300만원 버는 벌레)이니 하는 거죠. 물신주의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요즘 사람들이 ‘조물주 위에 건물주’를 지망하잖아요. 아주 심각한 문제예요.         

[사진= 안경선 PD]

Q. 이번에 출간한 『미안함에 대하여』, 세월호 참사 후 6년여 동안 <한겨레> 지면에 실은 칼럼을 묶은 책입니다. 여기서 미안함이란 ‘요행으로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인데, 요행이 없는 이들은 가령 성소수자, 난민, 이주노동자, 오늘을 끝없이 저당 잡힌 청소년, 가난한 사람 등 약자들입니다. 선생은 이들이 비단 약자를 넘어 사회적인 혐오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A. 사람들이 ‘다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한 사회의 성숙도를 말해줍니다.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다 존중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다르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다름을 우열 관계로 인식합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낫지.’ ‘동남아시아 사람보다는 내가 낫지.’ 이렇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해하려는 저급한 속성을 갖게 됩니다. 
비교에는 ‘성숙 비교’와 ‘경쟁 비교’가 있습니다. 성숙 비교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성숙했나’이고, 경쟁 비교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나’입니다. 경쟁 비교를 하는 사람은 자기의 소유물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우위를 내세워요. ‘나는 대한민국 남자야, 나는 이런 거 타고 다녀.’ 인간을 내세우지 않고요. 반면, 성숙 비교를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성숙을 모색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심 자체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사회는 어릴 때부터 경쟁 비교에 치우치게 만듭니다. 이것은 <독서신문>에도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왜 책을 잘 안 읽을까. 성숙 비교가 아닌 경쟁 비교에 익숙하기 때문이에요. 경쟁 비교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 혐오하고, 내국인은 난민을 혐오하고. 우리나라에 예멘 난민이 왔을 때, 독일처럼 100만명이 몰려온 것도 아니고 겨우 500여명이 왔는데 무려 70만여명이 청와대에 입국 반대 청원을 했잖아요. 테러리스트라며, 성폭행범이라면서요. 그로부터 지금 2년이 지났는데 그들이 무슨 사건을 저질렀다는 뉴스를 보신 적 있나요? 사람들이 얼마나 편견에 갇혀있는가. 반성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때 청원한 사람 중에는 반성하는 사람도 없어요.         

Q. 그런데 ‘요행으로 살아남은 자’ 중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행운으로 여기는 이들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우리 사회 비행운(非幸運)의 근원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A. 경쟁 비교에서 벗어나야 해요. 이게 핵심이에요. 아이들에게 등급 매기고, 이런 거 하지 말자. 대학 서열화 깨고 평준화해야 한다. 왜 끝없이 경쟁하게 만드느냐. 얼마 전 대한의사협회에서 공공의대 정책을 반대하며 만든 유명한 질문이 있었잖아요.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 지을 중요한 진단을 받아야 할 때, 의사를 고를 수 있다면 둘 중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A.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 B.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 이따위 질문을 하는 수준이라는 거죠. 저라면 B를 선택해요. 의술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래도 B가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사회 인문학적 수준이 바닥이에요. 이래서는 장래가 너무 어두워요.

Q. 책 『생각의 좌표』(2009)에서 “반민주세력이 득세하는 것보다는 민주 건달들이 득세하는 편이 수백 배 낫다. 역시 진보의 발자취로 보더라도 ‘민주 건달’들도 한자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8월 한 인터뷰에서는 “지금 집권하는 586은 민주 건달, 권력게임을 하느라 민생문제 관심 없다”고 말했다. 2009년 책에 적은 말을 후회하는지요?  

A. 제가 이미 2009년에 ‘민주 건달’의 등장을 예견했죠. 어떤 생산 활동이나 연구 활동도 하지 않고, 사회 운동이나 노동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20대 때 잠시 민주화 운동을 한 것으로 완장을 찬 사람들이 민주 건달이지요. 지금 주름잡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뭘 했나요? 그 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한국 사회가 진보하려면 소위 ‘민주 건달’들이 정권을 잡는 시기를 거쳐야 해요. 그들의 문제는 성찰이 없는 거예요. 오만하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을 했으니까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수구세력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무슨 공부를 했나요. 실제 현장에서 노동자, 서민들과 움직인 것도 아니지요. 최저임금 문제도, 비정규직 문제도, 세월호 문제도… 말하자면 끝이 없죠.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100가지 공약을 했는데 그중에 실현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나마 공수처 하나 붙들고 있지요.     

Q. 과거 한 인터뷰에서 ‘사회적인 활동 외에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묻는 말에 “책을 더 많이 읽고 싶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선생에게 책이란 무엇인가요?

A.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출처가 어디인가. 그 출처가 지배세력이 아니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방법밖에는 없는 거죠. 학교 교육은 국가권력인 교육부에서 관장하지요. 대부분의 매스미디어는 자본이 운영하지요. 그러니까 책을 보지 않으면 내 생각은 ‘지배 블록’(ruling bloc)의 이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페인의 한 작가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모두 감옥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 감옥에는 놀라운 창이 하나 있다. 모든 세계를 볼 수 있는.” 그 창이 바로 책이에요. 한국 사회에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선배 잘 만나서 많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에요.    

Q. 선생의 이방인 생활에 빛이 됐던 책 몇 권 추천 부탁드립니다.  

A. 프랑스에서 읽은 책으로는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과 잡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생각이 나네요. 한국에 와서는 꽤 많이 읽었는데, 조귀동의 『세습 중산층 사회』,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좋았어요. 최근에 읽은 책으로는 조정진의 『임계장 이야기』와 김지은의 『김지은입니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매튜 스튜어드의 『부당세습』, 마이클 린치의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등이 있습니다.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워낙 두꺼워서 읽기 시작한 지 제법 됐는데 아직 못 끝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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