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대한민국] 정성일 “영화는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다”
[책 읽는 대한민국] 정성일 “영화는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10.26 12: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성일 [사진=안경선 PD]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그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 영화를 가르치는 교수,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평론가이다. 과거에는 <키노>라는 영화잡지를 만들던 기자였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세상이 그에게 부여한 잡다한 명함일 뿐이다. 그리고 이 명함들은 그를 오롯이 설명해내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한곳에 고여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는 그를 명함 혹은 그 비슷한 것으로 뭉뚱그려 설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는 명함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어딘가로 흐르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본령(本領)도 이와 비슷하다.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연쇄. 부단한 운동성을 지닌 예술.

그런 점에서 그는 영화의 활력과 닮았다. 그 활력에는 영화에 관한 날카로운 분석과 통찰 이전에 영화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냉철하지만, 애호가는 천진난만하다. 무례한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후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영화와 닮은, 천진난만한 사람. 바로 정성일이다.

북촌의 어느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인사 후 자리에 앉아 허둥지둥 명함을 꺼내든 기자에게 그는 “전 명함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성일 [사진=안경선 PD]

Q. <독서신문>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 명사로 선정됐다. 독자들에게 인사 부탁드린다

A. 사람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불안’보다는 ‘화’인 것 같다. 그만큼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제까지 우리들이 만들어 낸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깝게, 집에서, 자기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건 바로 책이다. 내가 영화에 기대어 있는 사람이지만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로 화가 나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책을 더 가까이해야 하지 않을까. 책으로 여러분들과 만나고 싶다.

Q.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영화평론가로 이름을 알렸다. 영화평론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A. 나는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근데 당시 한국에서 영화감독이 되려면 현장에서 3~5년 정도 연출부를 해야 했다. 그때 연출부들이 버는 돈으로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그 시절에는 부모의 도움이 가능한 사람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화를 찍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면서 영화사 기획실도 들어가고, 시나리오도 쓰고 그랬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시절에 나를 알던 사람들이 영화에 관한 평을 부탁했다. 영화평론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필명으로 썼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게 있지 않나.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은 잘 안 풀리고, 가고 싶지 않은 길은 잘 풀리는 거. (웃음) 그때 썼던 글들이 여기저기서 읽히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지금은 폐간된 월간 <말>에서 기자가 찾아와 고정적으로 영화평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우리 잡지는 수배자를 제외하고는 자기 이름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태여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겠다 싶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지면에 그렇게 오래 글을 쓸지 몰랐다. 17년을 썼다. 그 세월 동안 내 원고를 담당했던 기자만 8명이었고, 그 사이 편집장은 11명이나 교체됐다. (웃음)

Q. 글을 잘 쓴다는 자각은 언제 들었는지?

A.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금도 그렇다.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남의 글을 보면서 이 사람은 글을 참 잘 쓰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쓴 글을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 내가 쓴 글을 편집부에 보내면 그 글은 이제 나와 작별이다. 자기가 쓴 글을 반복해 읽으면서 이때 내가 참 잘 썼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거기에 머물게 된다. 단지 필력만 그런 게 아니라 생각도 거기 머문다. 모든 글쓰기는 계속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일이다.

Q.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 <기관총 부대>(1963)가 ‘첫 영화적 경험’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정성일을 독서의 세계로 이끈 인생의 첫 책은 무엇이었나?

A. 특별히 그런 책은 없었다. 다만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책을 진짜 열심히, 전투적으로 사주셨다. 내가 읽거나 말거나. 아마도 어머니는 책이 곁에 있으면 얘가 언젠가는 읽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내가 책에 낙서하건, 찢건 그런 데에 개의치 않고 계속 사주셨다. 근데 그 생각이 어느 정도 맞았다. 어머니가 사주신 책을 마구잡이로 읽어나가면서 독서의 매력을 알게 됐다.

나는 오히려 책이나 영화보다는 음악을 더 좋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형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비틀즈의 ‘Get Back’을 들었는데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나 싶었다. 그 후로 비틀즈의 다른 음반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냥 음악 자체를 좋아한다. 그래서 가끔 내가 영화보다 음악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웃음)

Q.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인가?

A. 작년에 번역이 나온 조르주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을 읽고 있다. 그리고 내가 워낙에 모리스 블랑쇼의 팬이라서 그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굉장히 분간이 모호한 장르로 쓴 『지극히 높은 자』를 야금야금 읽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권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Q. 아직도 뭔가를 배우고 익히는 게 즐겁나?

A. 그렇다. 대충 만족하고 적당히 멈춰있다고 생각하면 괴롭다. 이를테면 내 존재가 고여 있는 느낌 혹은 내 생각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 싫다.

정성일 [사진=안경선 PD]

Q. 책 『필사의 탐독』에서 “모든 영화비평은 영화를 본 나와 영화를 쓰는 나의 대면”이라고 말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해준다면?

A. 영화 자체를 쓰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쓰는 글은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의 내 경험에 관해 쓰는 거다. 달리 말하면 영화평을 쓴다는 것은 영화를 보고 있던 그 순간에 내가 왜 그 장면에 매혹됐을까, 라는 것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그 경험과 매혹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한다.

담론과 형상은 분리돼 있다. 글은 담론, 영화는 형상의 영역이다. 그사이에 반드시 틈이 있고, 간격이 있고, 차이가 있다. 담론(글)이 형상(영화)을 뒤쫓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영화비평은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영화의 형상을 붙잡으려 노력하는 과정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영화비평을 읽을 때도 그 노력이 보고 싶은 거지 누군가가 그 영화에 관해 정답을 내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건 있지도 않다. 우리는 예술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 수학 문제를 푸는 게 아니지 않는가.

해럴드 블룸이 말했다. 시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들은 실수보다 더 나쁘다고.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공격적으로 오독한 비평이 가장 훌륭한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오직 자신의 체험에만 충실할 때 가능하다. 그 체험이라는 것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와 그 영화를 쓰고 있는 나 사이에 놓여있다.

Q. 어떤 영화를 볼 때 글이 쓰고 싶어지나?

A. 가령 두 편의 영화가 있다고 치자. 전반적으로 다 괜찮은데, 특별히 어떤 장면도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가 있고, 반대로 누가 봐도 실패작인데 한 장면만은 굉장히 특출한 영화가 있다. 나는 전자에 관해 글을 쓸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흥미롭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흥미롭다. 그 단 하나의 장면이 왜 나를 매혹했는가, 이런 생각을 안고 극장을 나서면 즐겁다. 글이 쓰고 싶어진다.

Q.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사실은 영화를 조금이라도 더 잘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영화를 직접 만들고 나니 어떤가? 영화가 더 잘 보이는가?

A. 예를 들어 말하겠다. 영화에서 한 인물을 일으켜 세워서 밖으로 내보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말하자면 카페에 앉아 있는 인물을 카페 밖으로 내보낼 때, 장면을 어떻게 자르고 이어 붙일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영화비평을 정말 잘 쓰는 사람도 이 과정을 온전히 알기란 힘들다. 나는 영화를 찍을 때 ‘이 장면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문학으로 치자면 구문 안에서 명사와 동사, 형용사와 부사를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논리나 기술보다는 창작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그걸 영화를 찍으면서 깨달았다.

Q. 임권택 감독의 <족보>(1979)에서 한 청년이 마을 어른의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관해 “단순하게 찍어도 되는 걸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진행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임 감독이 “그게 한국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을 대하는 태도”라고 답했던 상황과 비슷한 문제인가?

A. 그렇다. 그건 내가 전적으로 임권택 감독님에게 배운 거다. 누군가가 “한국적인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어느 감독이 아름다운 한옥을 찍어서 보여주는 건 굉장히 유치한 발상이다. 그런 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임 감독님은 쇼트의 진행으로 한국적인 것을 표현했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것이 영화 안에 어떻게 스며들어있는가에 관한 문제. 또는 그런 것들에 근거해 영화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Q. 이제는 영화평론이 펜에서 마이크로 넘어갔다. 영화평론가의 긴 글보다는 GV(Guest Visit : 관객과의 대화) 혹은 이미지와 결합한 영화유튜버의 견해가 대중적으로 더 많이 소비되고 있다.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A. 영화에 관해 글을 쓰는 행위가 혼자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싱글 음반을 녹음하는 거라면, 관객 앞에서 영화를 설명하는 행위는 라이브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둘 사이에 위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성격이 다른 비평 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화유튜버들의 비평은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장면의 저작권 문제다. 어느 유튜버가 저작권을 침해하면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그건 문자 그대로 범법이고 불법이다. 누가 내 영화에 관해 그런 식으로 비평한다면, 나는 단 한 장면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정성일 [사진=안경선 PD]

Q. 성범죄 혐의로 수십 년간 도피 생활을 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를 소비해야 하느냐, 포기해야 하느냐에 관해 지난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창작자와 예술을 분리해야 하는 게 맞는가?

A. 나는 예술과 예술가의 사회적 삶은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도덕적으로 문제를 저질렀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예술을 다 분서갱유(焚書坑儒) 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예술이 불타버려야 하지 않을까? 슈베르트는 성매매하다가 매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죽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아름답다. 어느 누구도 성매매하러 다니는 슈베르트를 떠올리며 그의 음악을 듣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의 문제는 다르다. 우선 그 둘을 구분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Q. 책 『필사의 탐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2002)에 관한 혹독한(?) 비평문이었다. <오아시스> 이후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이 진일보했다고 생각하는지?

A. 나는 이창동 감독이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존재다. 특히 <박하사탕>을 찍은 이후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만 <밀양>이나 <시>를 보면서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영화들에서 영화적인 순간을 발견하지 못했다. 스토리텔링을 뛰어넘는, 영화만이 가능한 어떤 순간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밀양>은 우아한 영화다. 좋은 이야기이고, 이청준 작가의 원작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부분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이 영화의 미덕이지, 내가 말하는 영화적 순간과는 결이 다르다. 말하자면 <밀양>은 너무 투명한 영화다. ‘이걸 보고 이해 못 하는 사람도 있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평론가의 입장에서 영화에 질문을 던지거나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에 반해 <버닝>은 굉장히 불투명한 영화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이창동의 영화는 모두 투명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버닝>은 모든 게 불투명했다.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대답을 내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버닝>에 관한 판단은 보류 상태다.

나는 영화를 보자마자 즉각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을 때까지 생각해야 한다. <버닝>은 다른 사람에게는 이미 상영이 끝났을지 모르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아직 상영 중인 영화다.

Q.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뤄낸 성취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A. 나는 상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상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상을 받았다고 해서 영화가 더 좋게 보인다거나,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안 좋게 보이거나 하는 일은 적어도 나에겐 없다. 단지 영화가 궁금할 뿐이다.

나는 <기생충>이 봉준호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봉준호의 가장 세련된 영화인 건 사실이다. 봉준호를 만나서 “당신의 두 번째 데뷔작 같다”는 말을 했다. 봉준호는 <옥자>까지 계속 같은 얘길 반복했다. 모든 영화의 줄거리가 ‘seek and find’다. <플란다스의 개>는 잃어버린 개를 찾으러 다니는 영화다. <살인의 추억>은 살인범을 찾으러 다니는데, 제대로 찾은 건지 알 수 없는 영화다. <괴물>은 잃어버린 딸을 찾으러 다니는데, 너무 늦게 찾은 영화다. <마더>는 살인범을 찾으러 다니는데, 제대로 찾아서 문제인 영화다. <설국열차>는 탈출문을 찾으러 다니는데, 그 문이 바로 옆에 있었던 영화다. <옥자>는 빼앗긴 옥자를 찾고 다시 돌아오는 영화다. 봉준호에게 물었다. 왜 맨날 같은 얘기를 반복하느냐고. 그러자 그가 “다음 영화는 다를 거예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어디 한번 보자”라고 했는데, 진짜 다른 얘기였다. 말하자면 구조는 같은데 패턴이 달랐다.

봉준호의 영화는 항상 절반으로 나뉜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절반이 됐을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는 거다. 속으로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라고 생각했다. 나는 거기서 문광이 등장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전반부는 너무 지루했는데, 그때부터 영화가 굉장해지더라. 일곱 번째 장편을 만들었는데,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을 주는 감독은 흥미롭다. 그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정성일 [사진=안경선 PD]

Q. 정성일의 영화적 동지를 떠올리면 감독도, 배우도, 평론가도 아닌 故정은임 아나운서이다. MBC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진정한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제일 먼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A. “당신 너무 빨리 떠났다.” 이 말을 제일 먼저 할 것 같다. 좀 더 우리 곁에 있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감독에게는 자기 영화를 전력을 다해 봐줄 수 있는 관객이 필요한 것처럼, 영화비평가에게는 자신의 비평을 정성스럽게 읽어주는 사람,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재능이 필요하다. 정은임은 그 희귀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한국의 영화비평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해졌을 거로 생각한다. 많은 영화인이 그녀의 방송에 출연해서,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 좋은 영화비평들이 쓰이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당신 너무 빨리 떠났다고 야단칠 것 같다. 진짜 애정을 갖고.

Q. 최근 주목하고 있는 한국의 신인 감독은 누구인가?

A. 안타까운 얘기인데, 나는 아직 포스트 봉준호를 발견하지 못했다.

Q. 한국 독립영화 진영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감독들이 있는데 어떤가?

A. 표현 그대로 ‘나름대로’다. 이를테면 96년도에 등장한 홍상수를 떠올려보면, 등장하는 순간부터 홍상수였다. 누구와도 겨룰 수 없는. 비록 두 번째 영화이긴 하지만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을 갖고 등장했을 때도 그랬다. 근데 지금 그 이름들과 겨룰만한 영화를 들고 나타난 사람이 있나? 물론 작은 별들은 많다. 근데 호랑이가 궁금한 거지 고양이가 궁금한 건 아니지 않나? “봉준호는 이제 이전 세대야”라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나야 하는데 적어도 내가 볼 땐 없다. 나는 한국영화의 뉴웨이브가 홍상수로 시작해서 봉준호에서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벨바그가 계속된 게 아닌 것처럼.

Q. 마지막으로 <독서신문>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A.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들』이다. 미술과 영화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데, “무빙 이미지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관한 질문을 품고 읽어볼 만한 책이다. 독자분들이 이 책을 지나가는 가을에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