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대한민국] 김영란 양형위원장 “독서로 경의를 배워라”
[책 읽는 대한민국] 김영란 양형위원장 “독서로 경의를 배워라”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7.31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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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현식 PD]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헌법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현장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여행에는 가이드가 있으니 여행 도중 떠오르는 가상의 질문에 가이드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책을 엮어 보았습니다.” (김영란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 中)

양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김영란 전 대법관이 여행 가이드가 됐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 독일, 한국에서 헌법이 만들어지던 역사의 현장으로 떠나는 여행의 가이드다. 독자는 친절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서 절대권력이 무너지고 일반시민이 권력을 잡는 그 역동적인 순간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이드. 그런데 이 가이드라는 말이 김 전 대법관과 퍽 어울린다. 그는 줄곧 시민에게 진보적인 정의(正義)를 안내해왔다. 2004년 한국 최초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된 그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판결을 내놨다. 대학교 시간강사의 근로자성을 인정했고, 불치병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했으며, 사립학교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판결에 기여했다. 성년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하는 판결과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 정정권을 인정하는 판결, 미성년자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아도 의사에 반해 성관계를 강요당했다면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의 가이드는 대법관 퇴임 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여느 대법관처럼 변호사 개업을 하거나 대형 로펌에 가지 않았다. 대신 대한민국의 법에 대해 말하는 여러 권의 책을 써냈으며,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일할 때는 이른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최초로 제안했다. 지난 2018년에는 베트남 시민평화법정에 서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이라고 선언했으며, 미투 운동에도 피해자의 편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대입 개편 공론화위원장으로서 대한민국 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숙의의 장을 이끌기도 했다. 

가이드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그가 이번에는 헌법 여행의 가이드가 된 것이다. 제목은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 부제는 ‘인간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 이 책에서 김 전 대법관이 안내할 길은 과연 어디에 닿아있을까? 사당역 한 카페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는 그와 만났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책 이야기로 꽃을 피웠는데, 그는 평소 TV, 넷플릭스, 유튜브 등 영상은 거의 보지 않고 책만 읽는다고 했다.   

[사진= 최현식 PD]

Q. <독서신문>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 명사로 선정됐다. 독자들에게 인사 부탁드린다. 

A.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영란입니다. <독서신문>은 제가 중학교 때 출간돼서 대학교 때까지 사서 읽었어요. 당시 주변에서 정말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 중에 하나였고, 저는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봤죠. 2~3년 전에 제가 책을 냈는데 그 책이 <독서신문>에 소개돼서 아직 <독서신문>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웃음) <독서신문> 독자님들께서 <독서신문>이 지속될 수 있게 계속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다독가로 유명하다. 지난 2016년 책 『책 읽기의 쓸모』를 통해 책을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자신을 수양하고 나 자신을 찾는 길’이었다고 말했는데… 책, 왜 읽어야 하는가?

A. 처음에는 책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빠져들었어요. 어릴 때 다른 오락이 없기도 했고요. 초등학교 5~6학년 때까지 집에 TV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집에 책이 없으면 친구 집에 가서 빌려 읽고, 좋은 책은 친구들과 나눠 읽고, 독서가 저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거죠. 또 저에게 책은 스승이기도 했어요. 책을 읽으며 세상에 대해 배우고, 삶의 폭도 넓히고, 다른 사람에 대해 이해하게 됐어요. 큰 스승이라고 생각해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변에 책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다 가르쳐주는 것이 책이에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어요.    

Q.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다면?

A. 그냥 많이 읽는데요. 오늘 읽다 나온 책은 미국 흑인 여성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판타지 소설 『킨』이라는 작품이에요. 주인공이 현대에서 노예제 시행되던 과거로 갑자기 시간여행 하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예요. 
저는 주로 소설과 철학, 사회평론, 전공서적을 섞어서 읽는 편인데요.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낸시 암스트롱이 쓴 『소설의 정치사』예요. 소설이라는 게 영국에서 어떻게 기원했고, 과거 여성 작가들이 현대 소설이나 근대의 개인을 발견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다루고 있어요. 샬럿 브론테나 제인 오스틴 등 우리가 잘 아는 작가들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 가족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정치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책이라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Q. 책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를 세상에 냈다. 이 책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A. 노무현 대통령 이래로 개헌 논의가 계속 있었고, 촛불혁명 때도 기본권 문제 등 헌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두됐잖아요. 사회적으로 헌법에 대한 이야기들을 굉장히 많이 하는데, 법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국민들에게 당연한 의문들이 생길 것 같았어요. 그래서 헌법의 역사적 기원은 무엇이고, 성격은 어떤지, 헌법이 만들어지고 사회에 적용되는데 우리가 얼마나 관여할 수 있는지. 그런 부분을 좀 쉽게 설명해보자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일단 재미있어야 하니까, 우리나라 헌법에 영향을 끼쳤던 서양의 헌법들이 만들어지는 현장에 독자들을 모시고 가보자, 그래서 그 현장에서 어떻게 헌법 논쟁이 이뤄졌고, 어떻게 헌법이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 사회는 어떻게 돼갔는지, 그것을 보여드리자. 이런 생각을 하고 쓴 거죠. 정확히 헌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헌법의 현장’ 이야기예요.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

Q. 딱딱한 법의 이론을 설명하기보다는 ‘가이드’를 자처하며 헌법이 만들어지는 역사 현장으로 독자와 함께 걸어 들어간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아테네의 연극이나 소설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쓴 이유가 있는지? 

A. 여기 루이 16세가 갇혀있었고, 여기서 기요틴으로 목이 잘렸고, 이 현장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았고, 이 현장에서는 영국의 존 왕이 대헌장을 승인했고, 이런 것을 글로써 생생하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패키지 투어의 가이드처럼 현장에 독자들을 모시고 가서 보여드린 거죠. 원래는 여러 명의 개성을 지닌 인물들을 출연시켰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너무 산만하고 초점도 흐려져서 다 없애버리고 1년 정도 새로 썼어요. (웃음) 그랬더니 훨씬 나아졌죠. 쓰는 기간은 6개월쯤이었는데, 출판사에서 1년 묵혀서 나왔어요. 여행하듯이 흐름을 따라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Q. 책 중간 중간에 독자가 궁금할 만한 부분을 콕 집어서 가이드에게 질문하고, 가이드는 그 질문에 답한다. 이 질문은 누가 만들었는지?

A. 처음에는 제가 만들었는데요. 편집자(홍순용)께서 통폐합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 질문도 했어요. 그걸 제가 다시 답변하고, 그런 작업을 1년에 걸쳐서 한 거죠. 책이 생각보다 얇아서 다행이죠. 더 두꺼웠으면 힘들 뻔했어요. (웃음) 사실 다른 나라도 몇 곳 더 추가하려고 했는데 ‘우리나라 헌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나라들’로 초점을 맞추니까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으로 충분하겠더라고요. 

Q. ‘인간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라는 부제처럼 책에는 헌법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실패의 역사’라고 바꿔도 좋을 정도로 많은데… 이 실패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

A.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헌법이 하루아침에 세워진 게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거듭된 실패와 좋은 민주주의를 향한 점진적인 노력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점점 더 나아져 가면 된다. 완벽한 헌법은 없다. 시대가 변해가면서 그에 맞게 개인의 기본권을 좀 더 존중해주고, 보통의 시민들이 더 많은 의견을 내고, 그러한 의견이 더 많이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또한, 우리 역사 자체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권리나마 얻기 위해 노력해온 결과이다. 희생과 노력과 자기반성과, 그런 여러 가지 역사적 경험들을 통해 축적돼온 것이고, 따라서 자랑해도 좋을 만하다. 그런 이야기. 결국 헌법의 이러한 본질에 대해서 안다면, 변화할 미래에 대해서도 우리가 크게 걱정하지 않고 걸어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Q. 이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는 특히 경의와 숙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이 둘의 개념을 설명해준다면…   

A. 다스리는 사람은 항상 경의의 감정을 가져야 해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극을 통해 시민에게 경의의 감정을 가르쳤어요. 경의의 감정을 가지지 못한 지도자는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왕과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 됐는가. 경의의 감정이란, 결국 오만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나는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모른다,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의 조언을 듣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더라도 나쁜 결정은 피할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정의에 대해서는 잘 잊지 않지만 경의의 감정은 때로 잊어버리거든요.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두 경의의 감정을 가져야 해요.
숙고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전문가가 아니고 지식인이 아니잖아요. 모두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고 따라서 필요한 것이 바로 숙고예요. 가령 시민들이 전문가들의 논변을 경청하고, 토론하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의견을 조정하는 거죠. 요즘 말로는 제가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회 할 때 했던 공론화 같은 거예요. 소위 숙의 민주주의죠. 
   
Q. 영국의 대헌장과 이를 이어받은 권리청원, 권리장전은 “왕권조차 법에 의하여 제한이 될 수 있다”는 ‘법의 지배’를 공표한 점에서 경의의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 사회의 경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고,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A. 영국의 대헌장처럼 우리도 그동안 권위주의 정부를 몇 번 무너뜨려 왔고, 거기서 경의의 감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는 엘리트그룹에 들어가지 못하면 심리적으로 박탈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익 추구에 있어서도 굉장히 손해를 보고, 반대로 엘리트그룹에 들어가면 부와 명예, 권력을 모두 갖출 수 있게 운영돼왔어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가 엘리트그룹에 경의의 감정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에게 연극을 보여주고 그 연극에 직접 참여하게도 하면서 경의의 감정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몰락하고, 경의의 감정이 있는 지도자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가는지 계속 보여줬죠. 돈을 가진 사람들이 이 연극에 필요한 자금을 계속 댔고요. 오만해서는 안 된다, 경의를 계속 학습한 거죠. 우리 사회도 경의의 감정을 교양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경의의 감정을 기를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사실 독서인 것 같아요. (웃음) 정말 좋은 책들을 읽고 나면 겸손해지잖아요.   

[사진= 최현식 PD]

Q. 프랑스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은 왜곡된 진실, 가짜뉴스 등 숙고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비롯됐다. 우리 사회도 음모론, 가짜뉴스 등이 끊이지 않고 이에 시민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힘들다. 우리 사회 숙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A. 저도 그 부분이 염려돼서 책에서 강조했어요. 진짜 뉴스도 많지만 가짜뉴스도 많고, 그것을 걸러낸다고 팩트체크를 하지만, 간혹 팩트체크 자체가 확증편향에 빠져서 이뤄지는 것도 있어요.   
결국은 시민들 스스로 자신이 확증편향에 빠진 것이 아닌지, 경의의 감정을 가지고 끝없이 의심하고, 사태를 깊고 넓게 볼 수 있도록 교양을 넓히는 수밖에 없어요. 중·고등학생들이 받는 학교 교육도 균형을 잃지 않게 해야 하고요. 또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지요. 
세종대왕 같은 굉장히 뛰어난 분이 다 결정해주면 편할 수 있어요. 그런데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시민이 다스리는 정치인 거죠. 모두의 자유는 항상 책임과 함께하고, 제가 책에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다룰 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러한 책임을 포기하면 히틀러 같은 사람을 불러오는 거예요. 우리가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싸워온 자유는 너무나도 쉽게 잃어버릴 수 있어요.          

Q. 21대 국회에서도 개헌의 불씨가 일어나고 있다. 국회의원이나 시민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A. 법을 전공하고 법과 관련한 일을 오랫동안 해온 저조차도 개헌이 어떤 쪽으로 진행돼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러니까 국회의원들은 시민들이 토론할 수 있는 참여의 장을 광범위하게 열어주시고, 시민들도 열심히 참여하셔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두 올려놓고 숙고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결국에는 시민들이 널리 동참하게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동참함으로써 참여의식도 생기고, 자기가 관여해서 만든 헌법에 책임감도 생기게 될 테니까요. 

Q. 양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법관 시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판결들을 내놨으며, 이후에도 김영란법의 기초를 놓는 등 사법 진보의 최전선에서 싸워왔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늘 소수자의 편에서 외로웠을 것 같다.

A. 꼭 소수자의 편에만 섰다고 볼 수는 없는데요. 그 계기라면, 제가 여성 판사가 열명도 안 되던 시절에 판사 일을 시작했거든요. 역사적으로 일곱 번째 여성 판사예요. 법과대학 다닐 때 여자 화장실도 없는 상황에서 출발해서, 또 여자 화장실도 없는 건물에서 판사로 일하고, 화장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웃음) 어쨌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살아남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정도 숫자가 돼야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못 내고 굉장히 조신한 여성처럼 살았거든요. 아이도 키우고, 시부모님도 모시고, 그런데 그렇다고 일을 줄여주지는 않거든요, 일을 못 해내면 여성 집단 전체가 비판받고… 그래서 아주 이를 악물고 일을 했어요. 같이 일하는 남성 판사들 골프 치러갈 때 저는 그럴 수 없었고, 애들 잘 때까지는 일을 못 하니까 재워놓고 밤새 일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외국에 있는 여성 판사들에게 물어보니 자신들도 다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불리한 위치에서 똑같은 결과를 내야 하는 사람들, 소수자의 심경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또한, 제가 무슨 투사여서가 아니라, 사법의 본질이 소수자 보호여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사법부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국민이 선출하지 않아요. 미국에서도 연방법원 판사는 선출하지 않거든요. 왜 사법부는 선출하지 않게 구성했을까? 사법부를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뽑으면 소수가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잖아요. 선출되지 않는 사법부의 역할은, 그러니까 다수의 의견 때문에 소수자의 기본적인 권리가 훼손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또 했던 거고요.

Q. 양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약자와 소수자의 편으로서 요즘에 관심을 두는 곳은 어디인가.  

A. n번방 사건 등 사법부가 양형을 정할 때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않다는 항의를 요즘 너무 많이 받고 있어요. 지금 맞닥뜨린 고민도 그거고요. 또 요새는 로스쿨 교수로서 학생들과 함께 대법원 최신 전원합의 판결을 읽고 있거든요. 이것을 꼼꼼하게 뜯어 읽어가면서 학생들 의견을 듣고, 제 의견도 말하고, 어떤 점이 잘 되고 있고, 어떤 점이 그렇지 않은가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계속하고 있어요. 벌써 관련 책을 두권이나 내기도 했어요.   
   
Q. 마지막으로, ‘김영란의 인생 책’ 몇 권 추천 부탁드린다. 

A. 이게 제일 어려운 질문인데. (웃음) 음반이나 책을 선물하는 게 어찌 보면 가장 어려워요. 나는 굉장히 어려운 클래식 뮤직을 좋아하는데, 연인이 아이돌 뮤직이나 팝을 추천한다면, 물론 그로 인해 음악적 배경을 넓힐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사귀는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 않겠어요? 책 추천 또한 나는 깊이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상대방이 처세술 책을 추천한다면, 가장 위험한 선물이 되죠. 저의 책 성향을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되고요. 그래서 책 추천도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웃음) 
잘 이야기 안 하지만, 인생 책이라기보다 제가 좋아하는 책들의 성향을 돌아보면, 독일 작가들의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토마스 만이라든가 프란츠 카프카라든가, 클래식컬한 소설들을 많이 읽었던 것 같고요. 거기서 저 나름의 세계관을 갖춰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요즘은 다양하게 읽고 있습니다. (웃음) 그리고 한국 책 중에서는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제일 좋아해요. 전권을 세 번쯤 읽었어요. 요즘 젊은 작가분들 중에서도 잘 쓰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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