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정이삭의 ‘미나리’, 미경험을 추억한다
[송석주의 영화롭게] 정이삭의 ‘미나리’, 미경험을 추억한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3.13 0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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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삭 감독, 영화 <미나리> 스틸컷

정이삭의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계 이민자 가족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감독 역시 영화 속 배경과 마찬가지로 미국 아칸소에 정착해 작은 농장을 운영하던 한국 가정에서 자랐다고 해요.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생경한 풍경의 영화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이삭은 이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치하는데, 가족영화의 익숙한 장르적 틀 위에 ‘이민’이라는 소재를 더해 특별한 보편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미나리>는 미국에서 보란 듯 성공해 가족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아빠 ‘제이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의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위해 애쓰는 엄마 ‘모니카’, 아직은 세심한 돌봄과 관찰이 필요한 딸 ‘앤’과 아들 ‘데이빗’, 그런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온 모니카의 엄마 ‘순자’의 시점이 한데 어우러진 영화입니다. 이들은 이동식 트레일러에 살면서 작은 농장을 운영해요. 순자는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집 근처 개울가에 되는 대로 막 뿌립니다. “미나리는 어디에 있어도 알아서 잘 자란다”고 말하면서요.

정이삭 감독, 영화 <미나리> 스틸컷

<미나리>는 독특하지만 평범하고, 낯설지만 익숙한 분위기의 영화입니다. 그 이유는 어느 사사로운 이민자 가족을 경유해 우리 모두의 모습을 길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으로써 영화는 관객들에게 경험하지 않은 것을 추억하게 만드는 묘한 영화적 체험을 안깁니다. 그 체험은 과거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점철된 감상적인 노스텔지어가 아닙니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된 <미나리>에는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벽에 부딪혀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어느 가족의 실존에 관한 고뇌가 깔려 있습니다.

영화는 과장과 으스댐 없이 건조하면서도 섬세한 터치로 이민자 가족의 일상을 은막 위에 아로새깁니다. 가령 <미나리>는 일부러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이민자 가족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미국인의 차별적 시선을 삽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에 등장하는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가난한 전직 군인이고, 신실하고 따뜻한 교인들이며, 제이콥 가족의 실수를 한번쯤은 눈감아주는 너그러움을 지닌 동료들이에요. 이처럼 <미나리>는 극단적 상황 설정을 통해 캐릭터를 괴롭히거나 가혹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또한 영화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 제이콥의 승리와 성취의 서사로 귀결되지 않고,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은 ‘가부장’이 아니라 ‘가족’인 거고,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도탄에 빠진 가족을 구원하는 영웅적 남성의 땀방울이 아니라 낯선 땅에 뿌리내리려는 가족 간의 사랑과 연대입니다. 그 사랑과 연대의 상징적인 기호가 바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미나리’이죠.

정이삭 감독, 영화 <미나리> 스틸컷

영화의 마지막, 불의의 사고로 수확한 농작물이 모두 불타버려 좌절한 제이콥은 아들 데이빗과 함께 불현듯 순자가 심은 미나리를 확인하러 개울가에 갑니다. 순자의 말처럼 미나리는 질긴 생명력과 적응력을 바탕으로 잘 자라고 있어요. 이때 카메라는 미나리와 그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찍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카메라는 그 모습을 멀리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요. 카메라와 인물간의 묘한 거리감과 시간 감각이 빛나는 순간이지요.

<미나리>는 특정한 경계와 울타리를 벗어나 인류 보편의 서사 중 하나인 실존의 문제를 이민자 가족의 이미지를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이 “마치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감상을 남긴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고단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미나리>에는 “우리가 머무는 순간을 반영하는 동시에 초월하기를 바란다”는 정이삭의 염원이 오롯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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