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왕가위의 퀴어영화, ‘해피 투게더’
[송석주의 영화롭게] 왕가위의 퀴어영화, ‘해피 투게더’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3.2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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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 영화 <해피 투게더> 스틸컷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는 불안하게 흔들리면서 거침없이 질주하는 퀴어영화입니다.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이 영화에서 가장 평화로운 순간은 아휘(양조휘)가 보영(장국영)을, 보영이 아휘를 말없이 바라보는 장면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아주 사소한 일로 헤어지는데, 어느 날 보영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아휘의 집을 찾아옵니다. 아휘는 상처 입은 보영을 간호하다가 문득 그의 잠든 모습을 바라봅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는데, 보영이 누워있던 자리에 아휘가 있고, 보영은 잠든 아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지요.

이러한 장면의 연쇄가 드러내는 것은 간명합니다. 나는 너를 보지만, 너는 나를 보지 못하는 상황 그 자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엇갈리는 것이고, 그 엇갈림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찰나적으로나마 감각하고 탐미하는 상호작용에 다름 아닐 테지요. 보영과 아휘는 그 과정 속에서 각자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 욕망이 발산하는 뜨거운 에너지에 어쩔 줄 몰라 방황하며,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이는 앞으로 그들의 인생에 무한히 반복하는 지난한 사랑의 궤적일 것입니다.

왕가위 감독, 영화 <해피 투게더> 스틸컷

나는 너를 보지만, 너는 나를 보지 못하는 상황은 <해피 투게더>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됩니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옥상 신’ 역시 마찬가지죠. 아휘는 빨래를 하고, 보영은 그 주위를 헛돕니다. 이때도 두 사람의 시선은 계속해서 엇갈리죠. 한편, 이 평화로운 옥상 신에서 보영의 시점숏으로 보이는 두 개의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하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땅’입니다. 왜 이 순간에 카메라는 보영의 시점을 빌려 하늘과 땅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위치한 옥상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알리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옥상은 하늘도, 땅도 아닌 공간이며 아휘와 보영은 이른바 옥상과 같은 ‘경계의 구역’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완전한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역설하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옥상이라는 공간은 퀴어로 살아가는 두 사람의 경계인으로서의 위치와 궤를 같이합니다. 왕가위는 퀴어의 사랑을 옥상과 같은 ‘경계의 구역’으로 공간화하며 아르헨티나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녹여내고 있죠.

왕가위 감독, 영화 <해피 투게더> 스틸컷

그러는 와중에 아휘에게 장(장첸)이라는 남성이 나타나고, 둘은 묘한 교감을 나누게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눈이 아팠던 장은 잘 안보여서 듣는 것에 집중했고, 그래서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데 더 익숙한 사람이에요. 장은 일을 그만두고, 아르헨티나의 최남단이자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에 가려고 합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클럽에서 장은 아휘에게 당신의 얼굴이 아닌 목소리를 기억하고 싶다고, 슬픈 일도 괜찮으니 아무 말이나 해보라며 녹음기를 건네고는 춤을 추러 갑니다. 보영과의 위태로운 만남을 이어가던 아휘는 그와의 이별을 직감하고, 녹음기를 부여잡고 한참을 흐느낍니다.

우수아이아에 도착한 장은 높은 등대 위로 올라가 녹음된 아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시퀀스에서 ‘경계의 구역’인 옥상은 등대로 전환되고, “아휘의 슬픈 일을 여기에 묻어주기로 약속했는데,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녹음기가 고장인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누군가 우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만 날 뿐”이라는 장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장은 아휘를 만나려고 하지만 아휘는 이미 보영과 헤어진 후 아르헨티나의 생활을 청산하고 대만으로 돌아간 뒤였죠.

대만으로 돌아온 아휘는 우연히(혹은 필연적으로) 장의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장의 사진을 몰래 가져오죠. 바로 다음 장면에서 ‘경계의 구역’으로서 등대는 지상의 철도 위를 달리는 전동차로 치환됩니다. 어두운 밤하늘과 네온사인으로 반짝이는 땅 사이를 질주하는 전동차 안에서 아휘는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그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이별이 남긴 생채기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감각하고 재발견합니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지요.

<해피 투게더>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서로 엇갈리고, 경계에서 분투하지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언제 다시 만날 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보고 싶으면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안다는 거다”라는 아휘의 내레이션은 보영 혹은 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해피 투게더>는 춘광사설(春光乍洩)이라는 원제의 뜻 그대로,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을 스크린에 드리우며 사랑을 살아낸 인간들을 축복하고 엔딩 크레디트를 올립니다. [독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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