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알아보는 영화 언어] ‘쉬리’
[명작으로 알아보는 영화 언어] ‘쉬리’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10.13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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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거나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를 선정하여 그 영화의 명장면을 분석합니다. 대중에게 친숙한 영화의 장면 분석을 통해 간단한 영화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이탈리아의 영화평론가 리치오토 카누도는 영화를 제7의 예술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공간예술인 건축, 조각, 회화와 시간예술인 문학, 음악, 무용을 종합한 것이 바로 영화라고 주장했는데요. 카누도는 산업이자 기술, 단순한 볼거리에 불과했던 영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린 사실상 최초의 사람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영화는 특히 ‘시간을 재현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김호영은 책 『영화이미지학』에서 앙리 베르그손의 사유를 빌려 “영화는 태생적으로, 본질적으로 이미지 매체다. ‘움직이는 이미지’를 통해, 그 이전에는 어느 예술도 꿈꾸지 못했던 실재의 운동과 시간의 재현에 성공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영화의 시간 재현을 미학적 관점에서 정립한 사람이 있는데요. 바로 질 들뢰즈입니다. 그는 책 『Cinema 1』에서 “영화는 몽타주, 움직이는 카메라, 시점의 해방 등을 통해 영사로부터 분리되고, 그로부터 장면은 공간적 범주이기를 멈추고 시간적 범주가 되며, 영화이미지를 이루는 각 단면은 부동적 단면이 아니라 유동적 단면이 된다”고 말합니다.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공간’은 거의 매순간 인지하지만 ‘시간’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공간은 눈에 보이고,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공간을 둘러보세요. 혹시 지하철 안에 계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하철 내부’라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인지합니다.

하지만 시간은 좀 다릅니다. 우리는 시계의 초침이 돌아갈 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계라는 물질의 움직임을 통한 간접적 인지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혹시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열심히 일하다가 문득 창문을 봤는데, 어둑해진 창밖을 마주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그때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뒤늦게 포착한 것에 불과하죠.

영화는 이러한 시간의 단속적인 흐름을 연속적으로 포착한 최초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사물의 움직임을 목격하고, 그 사물이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을 스크린을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합니다.

‘슬로 모션’(Slow montion)은 바로 그러한 시간의 흐름을 확대해 포착하는 영화적 기법입니다. 그러니까 슬로 모션의 미학은 사물의 행동을 단순히 느리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존재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의 시간을 느리게 포착, 시간을 확대하고 팽창시키는 데 있습니다.

영화 <쉬리> 스틸컷

<쉬리>(1999)의 내용은 모르더라도, 이 슬로 모션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많을 겁니다. 바로 한석규(유중원)와 김윤진(이명현)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인데요. 한석규는 자신의 애인인 김윤진이 남파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눌 수밖에 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강제규 감독은 클로즈업과 슬로 모션을 통해 한석규의 시공간을 확대하고 팽창시킵니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 스틸컷
영화 <집으로 가는 길> 스틸컷

중국 제5세대 영화감독 중 한명인 장이머우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1999) 역시 슬로 모션이 인상적으로 활용된 영화입니다. 장쯔이(쟈오 디)와 쩡하오(류어 창위)의 풋풋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두 사람이 멀리서 마주보는 장면을 슬로 모션으로 포착합니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루이스 자네티에 따르면 슬로 모션은 움직임을 진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행위일지라도 슬로 모션에서는 우아하고 품위 있게 안무한 것처럼 보인다”며 “빠른 속도가 코미디 본연의 리듬이라면 느리고 위엄 있는 움직임은 비극에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즉 슬로 모션을 통해 <쉬리>가 비극을 극대화한다면, <집으로 가는 길>은 서정을 극대화합니다. 이처럼 슬로 모션은 시간을 의도적으로 확대하고 팽창시킴으로써 인물이 처한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하는 영화적 기법입니다.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시간을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감독은 바로 그 순간을 슬로 모션으로 표현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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