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외로움을 이로움으로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외로움을 이로움으로
  • 스미레
  • 승인 2019.04.2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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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트랜드인 세상이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어 #혼밥, #혼커의 훈장을 달아본다. 혼자됨을 자랑스러워하고, 독려하는 분위기는 어쩌면 그만큼 혼자되는 게 쉽지 않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조용하고 개인적인 경향성이 ‘괜찮은’ 취향으로 자리 잡아가는 건지도.

그렇다면 반가운 일이다. 사실, 인구의 삼분의 일은 나처럼 내향적인 사람들이라고 하니까. 예컨대 사람들 속에서 빠르게 방전되고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조금씩 충전이 되는.

나는 내 고독력(力)을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몇 년 간 겪은 외로움은 생경했다. 고독을 최고의 충전요법으로 섬기는 내게도 육아의 외로움은 특별히 신경쓰이는 것이었다. “종일 아기랑 함께 있는데 왜 외로워?” 남편이 물었다. 악의라곤 하나도 없는 해맑은 얼굴이었다. “해 봐.”라고 답 하고 돌아서며 나도 궁금했다. 왜 이렇게 외로운건지. 그리고 이 외로움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니 그랬다. 결국 모두가 외롭다. 새로운 자리에 적응하기 까지는 더욱 외롭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원 버스 안에서, 인구밀도 높은 사무실에서, 모임에서 틈틈이 외롭다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가하면 부재 시에야 더욱 또렷해지는 것들도 있다. 거실 한 켠을 지키던 가구가 빠져나가고 나면 그제야 ‘아, 거기 그게 있었지.’ 싶은 것처럼.

내 삶에서 내가 지워진 순간. 그때만큼 나 자신이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아이를 키우며 내가 그토록 외로웠던 건 내가 결핍되었기 때문이었다. 24시간 모든 것을 나에게 의존하는 연약한 아기를 돌보며, 나 또한 의지할 곳이 나 자신 뿐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일까.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일을 자기 힘으로 해보는 것.

하여, 외로움을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육아와 관련된 모임, 정보, 관계, 만남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용량만큼으로 제한했다. SNS를 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로 이사왔다. 그동안 짐처럼 지고 있던 무리 속의 ‘인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버렸다.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정체감을 보존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던가. 나라는 한 사람이 이다지도 소중한 사람이었던가. 조금씩 절박해졌다.

말 못하는 아기, 그리고 나 자신 외엔 아무도 없는 그 막막함. 고단함에 지쳐 쓰러지면 그게 잠이었다. 나 자신을 보듬으며 나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실용성을 따질 것도 없이 모든 걸 시간에 맡겨버리는 날들 사이로 미묘한 난제들은 또렷한 해답이 되어갔다. 신기했다. 그게 누군가를 붙잡고 푸념하고, 정해진 답을 듣는 것보다 훨씬 나을 때가 많았으니까.

외로움 속에서 자연스레 오감의 감도도 높아졌다. 아이의 스치는 표정에서도 많은 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새 생명과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것이 기적 같았다.

나 자신을 벗삼고, 그에 귀 기울이는 것은 육아에도 분명 도움이 되었다. 기질, 성격, 환경, 가치관, 취향 등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 사람인 부모는 아이에게 그들과 비슷한 기질, 환경, 가치관 등을 제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와 아이가 온전히 같진 않지만, 나를 관찰한 뒤 아이를 관찰한다면 아이를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기질처럼 선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부모에게 가장 편한 방법이 아이에게도 가장 편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누군가’에게 효과적이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 자신이 잘 하는 것을, 자신이 잘 하는 방법으로 아이와 함께 즐기면 어떨까. 내 경우 그것은 책 읽어주기였다. 읽고, 쓰고, 기도했다. 그렇게 육아, 그리고 나 자신에 몰두하면서 외로움도 줄었다.

혼자가 된다는 건 때때로 길을 잃고, 분산 되고, 재형성 되는 과정을 포함한다. 어쩌면 나는 육아보다 그렇게 나 자신과 마주쳐야 하는 시간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하이힐을 벗고 맨 얼굴을 드러낸, 쉽게 화내고 약해지는 나라는 사람이 보기 싫었는지도. 한때는 불안함에 누군가를 따라하려 무진 애를 썼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다.

하지만 나는 그들 중 누구도 아니었다. 남을 부러워하고 따라하느라 지치느니, 차근차근 내가 되어가는 게 나았다. 내 자신의 더 나은 버전이 되고 싶어졌다.

육아기는 그렇게 앞만 보고 내달리던 우리 삶에 점을 찍는다. 청년과 중년 사이의 어딘가. 좋든 싫든,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단독자’(1)가 되어야하는 시기다. 세상에서 잠시 한 발 물러나는 시기. 그렇게 뒤로 물러서면 숨 쉴 만한 공간이 생겨나곤 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육아하며 진정한 혹은 새로운 자신을 만났다고 한다. 새로운 취미나 직업을 갖게 되거나, 삶을 바라보는 틀 자체가 바뀌었다고도 한다. 자아성찰, 성장, 그런 진부한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고, 아이를 이해하려 애쓰다 새로운 생각을 얻고,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수정하는 경험을 한다. 나 역시 처음으로 세세한 기호들, 오래된 습관들, 지리한 기억의 파편들까지 꺼내 보고 뒤집어 보았다.

결코 편하고 느긋한 치유의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미래는 바로 그 시간, 외로울 때 무엇을 하느냐에 달렸다. 외로운 시절에 축구를 하면 축구 선수가 되고, 그림을 그리면 화가가 된다던가. 고독한 시간은 자신과 마주하며 자신을 갈고 닦는 시간이다.

전문가가 되지는 못해도 아마추어나 애호가가 되어 평생의 양식을 가질 수는 있을 테다. 누구도 위안이 되주지 못할 때면 나는 안으로 침잠하여 말들을 끄집어내었다. 훗날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을 이야기들, 반짝이는 감정들은 물론 피로와 좌절감까지 빠짐없이 기록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나만이 갖는 나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을, 그 덕에 안다.

육아로 인해 단절되고 외로운 이들에게 아니, 지금 고독한 누구에게라도 고독을 추천한다. 육아는 결국 나 자신과 함께 한, 나 자신에 대한 경험이다. 나는 이제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외로움을 이로움으로 바꿀 수 있는 열쇠는 우리 안에 있다고. 혼자인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고.

▲ 단어설명
단독자(1)(單獨者, Der Einzelne) :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개념으로 인간을 하나의 특정한 주관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이고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는 경우에 쓴다. [지식백과출처] 본문은 집단 속에서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버리고 자신을 잃어가는 그 전체, 즉 집단의 반대편에 서는 존재를 의미한다.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자연육아, 책육아 하는 엄마이자 미니멀리스트 주부.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쓰는 엄마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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