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의 소묘
어느 가을날의 소묘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8.11.1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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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던 가을날, 우연히 만난 여인에 의해 마음의 변화가 일었다. 권태롭게만 느꼈던 일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난 것이 그것이다. 형형색색 봄꽃의 아름다움, 여름날 비 갠 하늘에 떠 있는 찬란한 빛깔의 무지개, 또한 가을이면 꽃 같은 단풍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남의 불행을 보고 내게 주어진 행복을 새삼 느낀다는 게 사실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엄연한 현실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

며칠 전 오일장이 서는 시골 장터에 갔다. 장터에는 근동 마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이때 장터 초입에서 한바탕 각설이 타령이 푸짐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누덕누덕 기운 각설이 옷을 입은 엿장수 모습이 나름대로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엿장수의 각설이 타령하는 모습에 어린 날 할머니를 따라 시골 장터에 갔던 추억이 오버랩 됐다. 나도 모르게 각설이 엿장수 엿판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엿판 위엔 여러 종류의 엿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고소한 참깨 엿, 노란빛의 호박엿, 드문드문 콩과 땅콩이 박힌 콩엿, 보얀 분을 온몸에 뒤집어쓴 흰엿가락은 보기만 해도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엿판 위에 쌓인 먹음직스러운 엿들이 무언의 호객행위로 작용한 듯 많은 행인이 엿장수 주위로 몰려들었다.

엿장수가 또다시 한바탕 각설이 타령으로 좌중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여러분 못 잊어 또 왔네, 얼씨구절씨구 .” 특유의 걸걸한 음성과 능숙한 몸짓으로 흥겹게 춤을 춘다. 연신 가위도 쩔꺼덕, , 울린다. 의외로 엿장수는 여인이다.

엿장수의 각설이 타령에 많은 사람의 시선이 엿장수 주위로 쏠렸다. 그때 여인의 손놀림이 어색해 보인다. 자세히 외양을 살펴보니 엿장수는 앞을 못 보는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여인 엿장수의 가위 소리와 각설이 타령에 홀려 장터를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때는 어느 사이 점심때라 장터 국밥집으로 갔다. 소머리국밥을 한 그릇 시켰다. 이때 여인 엿장수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머뭇머뭇 들어온다. 그리곤 내 앞자리에 앉는다. 뜻하지 않게 엿장수 여인과 동석한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끈한 국밥이 나오자 그녀는 큰 엿가위를 조심스레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가위를 무척 귀하게 다루시는군요. 보아하니 오랫동안 써 온 가위 같아요.”

, 이 가위는 저의 부친이 쓰던 물건입니다. 아버지께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이 가위 하나지요.” 그는 별다른 경계심 없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선뜻 나에게 털어놓는다. 한편 몹시 시장기를 느낀 듯 뜨거운 국밥 속에 흰 쌀밥을 그릇째 들고 부어서 말았다. 그리곤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다. 그리곤 그녀는 묻지도 않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또 토로하기 시작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엿장수인 아버지를 따라 장돌뱅이 신세가 됐단다.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식탁 위를 더듬어 엿가위를 집어 든다. 그것을 자신의 품에 포옥 안더니 한 손으로 가위를 쓰다듬으며 말을 잇는다.

이 가위가 제겐 생명 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셔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을 때 저는 이 가위 하나 들고 이 장 저 장을 떠돌며 엿을 팔아 그것을 호구지책으로 삼았지요. 아버지는 생전에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어떤 경우라도 이 가위만은 손에서 놓지 말라고요.”

그녀는 어느 사이 눈가가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왠지 그녀가 측은했다. 또한 끝이 닳아 뭉툭한, 군데군데 녹이 슨 엿장수 여인의 무쇠 가위를 바라보며 문득 유산의 의미를 곱씹어봤다. 정녕 값진 유산은 무엇일까? 많은 재산이어야 할까? 아님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일러주어야 할까? 엿장수 여인의 말을 듣자 갑자기 세 딸에게 남겨줄 유산에 대하여 고뇌하게 된다.

그날 짧은 시간 동안 깊은 고심을 했다. 세 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은 물질보다 표상으로 삼을만한 삶의 철학을 안겨주는 일이라는데 결론이 내려졌다.

내 생각이 이에 이르자 다시금 엿장수 여인 옆에 몸을 뉘고 있는 무쇠 가위를 눈여겨봤다.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 하고 많은 유산 중에 하필이면 엿장수 가위를 물려받은 처녀 엿장수다. 이 여인은 지금껏 수많은 세월을 그 가위를 삶의 지팡이 삼아, 때론 연인 삼아 생을 꾸려오지 않았던가.

무심히 지나칠법한 엿가위가 왠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어느 볕 고운 가을날의 뜻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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