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식의 인생무대] 꺼지지 않는 불
[김혜식의 인생무대] 꺼지지 않는 불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8.06.0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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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작은
도서관장>

[독서신문] 나이 탓인가 보다. 틈만 나면 학창시절 추억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친구를 만날 생각에 유독 밤이 길게만 느껴지던 애틋한 순간이 있었다. 친구는 성격도 취향도 나랑은 딴판이었다. 학교에서 특별활동 시간에 문학을 선택했고 미술에 열중했던 내성적인 나였다. 반면 그 애는 체육에 소질이 있어 달리기, 높이뛰기를 잘하고 성격 또한 모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단짝이었다. 감기몸살로 며칠씩 앓느라 학교를 결석하면 그 애는 자신이 수업 시간에 배운 공부를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공책에 적어 내게 보여주곤 했었다. 뿐만 아니라 궁핍한 집안 형편으로 도시락을 못 싸가는 나를 위하여 꼭 두 개의 도시락을 준비해오곤 했다.

날만 새면 학교에서, 방과 후에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갑자기 기울어진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친구는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이 꽃을 피웠다. 친구는 시장에서 생선 좌판을 벌인 어머니를 도왔다. 친구가 보고 싶어 찾을 때마다 그 애가 두른 앞치마에선 비릿한 생선 비린내가 풍겨오곤 했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 생선 비린내마저 향기로웠다. 마치 그 애가 흘리는 땀 내음처럼 느껴져서이다. 어머니를 도와 열심히 일하는 친구의 모습이 대견스럽고 한편 장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정 많은 그 애는 나를 만날 때마다 생선 몇 마리를 어머니 몰래 싸 주곤 했다. 어느 날은 생선 값을 냈더니 쌀을 몇 되 박 사서 내게 안겨주기도 했다. 

나 역시 지난날 그 애처럼 학교에서 배운 공부를 꼼꼼히 필기해 내용을 그 애에게 들려줬다. 나는 그 애를 지도하며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해서 좋았다. 그 애는 자신이 포기한 공부를 내게 틈틈이 배울 수 있어 유익했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지금도 눈만 감으면 마치 엊그제 일처럼 그때의 잔영이 눈앞에 어린다. 어수선한 장터에서 친구와 함께 책장을 넘기며 공부하던 그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어머니를 도와 앞치마를 두르고 거침없이 생선 머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던 친구이다. 나를 만나면 미처 생선 피 묻은 장갑도 벗지 못한 채 학과 공부에 열중하곤 했었다. 이러한 그 애의 학업에 대한 집념은 나중엔 주경야독으로 이어졌다. 학업 중단 2년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 드디어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인생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했던가. 지난날 친구의 강인한 의지는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선천적 장애로 인하여 몸이 불편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내조하여 번듯한 중소기업체를 일구게 했다. 이제는 허리 펴고 살만한 형편이지만 잠시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그녀이다. 요즘은 불우 이웃을 위하여 자원봉사를 하며 뜻깊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는 지난 우리의 우정이 오늘날 자신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왔다고 늘 고마워한다. 그러나 나는 외려 그녀가 감사할 따름이다. 그동안 역경과 고통의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녀의 삶을 내 인생독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진정성을 안다고 하였던가. 가난이라는 굴레에 갇혀 참으로 힘들었던 지난날, 친구는 나에게 사막이 숨긴 샘물 같은 존재였다. 학창시절 가난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의 깊은 우정을 확인할 수 있었을까. 요즘도 우리 우정은 학창 시절의 마음 온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늘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나를 비춰주는 친구는 지난 세월 가난이 안겨준 인생의 보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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