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비밀의 정원’이 성폭행 피해자를 다루는 방식
[송석주의 영화롭게] ‘비밀의 정원’이 성폭행 피해자를 다루는 방식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4.11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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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컷

박선주 감독의 영화 <비밀의 정원>(2019)은 성폭행 피해자 정원(한우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원은 고교 시절, 여동생이 아파서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가 새벽에 혼자 집으로 가는 길에 성폭행을 당했어요. 그래서 여동생과 엄마에게 원망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동생이 아프지 않았다면, 엄마가 집에 함께 가주었다면, 그런 참변은 피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요.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정원은 집을 떠나 오랫동안 이모와 이모부 밑에서 자랐습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어요.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정원의 클로즈업 된 얼굴과 절규의 목소리,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처절한 몸부림 같은 것 말이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랑곳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냉정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순간들을 모두 괄호치고 있어요. 잔혹한 가해자의 액션과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피해자의 리액션도 전무한 영화인 거죠.

성폭행을 소재로 한 영화들에는 대개 관객들이 분풀이를 할 수 있는 대상, 즉 가해자가 등장합니다. ‘광주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을 다룬 황동혁의 <도가니>(2011)가 대표적인 예이죠. 이 영화는 피해자(선)와 가해자(악)의 구도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이어 피해자가 성폭행 당하는 장면을 불편할 정도로 자세히 보여주고 있어요. 이에 따라 관객들은 쉽게 가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를 연민(혹은 구경)하는 자리에 위치하게 됩니다. 성폭행 피해자의 부모가 직접 가해자들을 처단하는 내용의 <돈 크라이 마미>(2012)와 <방황하는 칼날>(2014) 역시 비슷합니다. 여기서 관객들은 징벌당하는 가해자의 모습을 통해 모종의 쾌감을 느끼게 되지요.

영화 <소원> 스틸컷

반면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준익의 <소원>(2013)은 다소 결이 다릅니다. 영화는 ‘사건의 고발’이 아닌 ‘피해자의 회복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어요. 장르적으로 말하면 ‘사회문제 영화’와 ‘가족영화’의 특징을 섞어 비난과 연민이 아닌 치유와 회복의 키워드에 집중합니다. 또 자극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걷어 내고, 우리 사회가 성범죄로 인해 고통받는 아동청소년 피해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보듬어야 하는지를 지혜롭게 묘사하고 있지요.

<비밀의 정원> 또한 그렇습니다. 영화는 ‘사건’이 아닌 ‘사건 이후’의 시간을 조명함으로써 피해자가 과거의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정원이 성폭행을 당하고 1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말하자면 정원은 ‘소녀’가 아니라 ‘20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죠. 이 시간차가 중요한 이유는 그간의 영화에서 성폭행 피해자들이 대부분 ‘소녀’의 이미지로 무분별하게 소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는 여성의 성적 고통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그 어떤 연령대의 여성보다 효과적이거든요.

<비밀의 정원>은 성폭행 피해자를 ‘소녀’라는 정형화된 이미지의 틀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또 영화는 정원을 무결하고 나약한 피해자가 아닌, 직업을 가진 주체적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이와 함께 정원을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남편과 이모부 캐릭터를 통해 남성 일반을 혐오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자연스레 젠더의 위계를 허물고 있지요. 두 사람의 직업이 목수인 이유는 아마도 정원이 안식할 수 있는 새로운 심적 공간을 지어준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컷

<비밀의 정원>의 영어 제목은 ‘Way Back Home’입니다. 직역하면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영화의 후반부에 정원은 대학 입시를 위해 지방에서 상경한 여동생을 밤늦게 홀로 돌려보내지 않고, 남편과 함께 자동차로 집까지 바래다줍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른 정원은 비밀로 숨겼던 과거의 아픔을 남편에게 털어놓습니다. 이어 자동차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밤과 새벽의 시간 위를 가로지르며,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합니다. 짧은 인서트숏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는 긴 호흡으로 오랫동안 보여주고 있어요. 사건 이후, 자신의 마음을 온전하게 기댈 집이 없었던 정원이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 그 과정 자체가 그만큼 중요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도착한 정원은 집 주변 어느 고택 앞에 있는 큰 나무를 동생과 함께 힘껏 밀어요. 큰 나무가 당연히 밀릴 리가 없지요. 이 액션의 목적은 두 자매가 실제로 나무를 밀어서 휘게 하거나 쓰러뜨리려고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도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노력했다는 감각을 얻기 위한 생존의 몸짓이 거기에 있습니다. <비밀의 정원>은 수영강사인 정원이 수영장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을 멍하니 보고 있는 모습에서, 해면이 상승하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오랜 시간 메마르고 텅 비어있던 정원의 삶이 아름다운 물빛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이 영화의 태도가 얼마나 기특하고 따뜻한지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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