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아마추어의 우아함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아마추어의 우아함
  • 스미레
  • 승인 2019.10.24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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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부지불식간에 걷고 뛰었다. 허둥대던 나도 아이를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일에 종내는 익숙해졌다. 놀랍고 반가웠다. 이제야말로 아마추어 딱지를 뗄 때라는 사치스런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아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내 예상을 확 벗어나면서 발생했다.

숫자, 기계, 과학… 아이가 자랄수록 어안이 벙벙해졌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아이는 스폰지처럼 많은 걸 흡수했고 수준은 날로 높아졌다.

”기체는 왜 잡을 수 없어요?“, ”세상에는 몇 개의 숫자가 있어요?“

허허허… 그저 웃었다.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은 남편에게 묻거나 인터넷에서 답을 찾아봤다. 그러나 남편은 바빴고, 인터넷 설명은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학 문제를 아이가 나보다 더 잘 푸는 순간도 생각보다 빨리 와버렸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한 부모 강연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저는 아이가 뭘 물어도 그럴듯하게 대답을 잘 해줘요. 아이는 저를 이기려고 악을 써요. 솔직히 몰라도 아는 척, 못 해도 잘하는 척해요. 그래서 우리 아이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아요. 엄마는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죠. 아이를 똘똘하게 키우려면 그런 엄마가 되어야 해요.“

대단한 열정이라 생각했다. 저 정도면 ‘프로’ 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어려운 질문에 즉각 대답해주고 아이의 경쟁심도 건드려주는 그 엄마는 멋져 보였다. 나는 여전히 아마추어 엄마였다.

그러나 모르면서 아는 척, 못 하는 걸 잘하는 척 가장하기는 싫었다.

어설픈 답은 아이를 헷갈리게 했다. 그런 답을 하느니 ‘모른다’ 솔직히 말하는 편이 나았다. 아이에게 찬찬히 질문을 되묻거나, 관련된 책을 찾아 읽어주거나, 아이 질문을 노트에 적으며 정리해 보는 게 내 식의 노력이었다. 

몰라서 같이 찾아보고, 어려워서 달려들지 못했다. 모르니까 책도 잡는다.

아이와 같은 혹은 그보다 느린 속도로 이해해 나가며 후속 질문과 가설을 공유했다. 너그러워서라기보단 알아도 안다고 자만하지 못해서 그랬다. 이 나이 먹도록 무엇하나 근사하게 포장할 줄을 몰라서.

어려운 문제 앞에선 주눅이 들었다. 결국, 엉성한 설명 대신 ‘사실은 엄마도 잘 몰라’하며 해맑게 웃어 버렸다. 아이가 문제를 풀어내면 아이와 춤을 추며 기뻐했다.

전문가처럼 가르치진 못해도 수학의 즐거움을 극대화해주는 건 내가 해 볼 만한 일이었다. 고수 엄마들 따라 해 보려다 자신이 없을 땐 아이와 보드게임이나 실컷 했다. 재밌으니까!

많이 아는 엄마로 거듭나 아이의 경쟁 상대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이가 무엇을 물어도 자존심 상하거나 부끄럽지 않을 사람, 천천히 같이 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같은 속도로 달리며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서로 놓친 것을 깨우쳐주는 사이이고 싶다.

만약 내가 더 많이 알았더라면, 실력자였다면, 나 또한 어땠으리란 보장은 없다.

너도 나만큼은 해야 한다는 욕심과 완벽주의로 인해 더 높은 성과를 원하고, 이 쉬운 걸 왜 못하냐며 가차 없는 피드백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혀에 모터 단 듯 설명하고, 채근하며 어른의 위용을 뽐내기는 쉽다.

오히려 아이 눈높이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말을 아끼는 데 더 많은 인내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 자신이 ‘육아 고수’나 ‘전문가’가 아님에 감사한다. 그 덕에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모을 수 있었다.

육아를 책으로 배울 수 있어도 ‘익힐 수’는 없다. 직접 부딪혀 해보지 않으면 영영 모를 일 투성이다. 육아는 눈물도, 웃음도, 좌절도, 반성도 있는 인간적인 경험이다. 로봇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빈틈없는‘프로페셔널 육아러’가 아니어도 할 만한 일이다.

시사지 편집장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엘런 러스브리저에 의하면 아마추어에겐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고 한다.

아마추어에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해야 한다는 엄혹한 멍에가 없다. 
부담감과 책임감에 짓눌릴 일도 없고, 치열한 경쟁도 없다. 공연장의 형편, 음향 상태나 본인의 정신 상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청중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도 아니다. 아마추어는 좋아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결과로 당신은 스스로에 만족하고(...), 연주를 들어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다.

그래, 어차피 아마추어인데 위축되고 조바심낼 필요가 무얼까.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즐기면 충분한 것을. 기준을 낮춰 나 자신을‘아마추어 육아러’라 생각하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생각보다 크다. 긴장이 누그러지고 웃음이 늘어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부모님은 음악과 무관한 회사원과 가정주부다.

많은 음악 영재가 음악 가족 안에서 자라며 도움과 지원을 얻지만, 조성진에겐 가계의 음악적 유산도 부모의 올인도 없었다.

‘그림자 부모’로 통하는 그의 부모는 어떤 경우에도 욕심을 내거나 나서지 않았다. 학교에 먼저 찾아간 적도, 아이의 레슨에 간섭하는 일도 없었다.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거나 하는 목표도 갖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믿었을 뿐.

“부모님이 음악을 잘 모르셔서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신 것 같다. (그 덕에) 나 스스로도 나는 잘될 거란 믿음과 자신감이 있었다. 믿어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다.” 쇼팽 콩쿨 1위 후 조성진은 말했다.

아이의 분야를 잘 모른다는 건 과열방지장치를 단 것과 같다.

잘 몰라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아이를 믿을 수밖에 없다.

묵묵히 믿으며 다정히 응원하는 것. 나는 이것을 ‘아마추어의 우아함’이라 칭하고 싶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그 생각도 난다. 그동안 나는 이성이 감성보다 ‘프로페셔널’하고 우월하다는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감성적인 내 존재는 많은 순간 작아 보였고, 나 스스로도 그런 성향이 마뜩잖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이에게 금문교에 관한 책을 읽어줄 때면 나는 아이에게 금문교에서 본 노을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언젠가 본 그 노을이 아름다워서 마음에 저장해두고 자주 꺼내 본다는 뭐 그런 이야기.

아이가 하품을 하면 그제야 감상에서 깨어났다. 설명도 잊은 채 감상에 빠져든 내 모습이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창밖을 보던 아이가 그런다.

“엄마, 노을 좀 보세요. 엄마가 금문교에서 본 노을도 저랬어요? 나는 오늘 노을을 저장할래요. 엄마도 저장해요. 엄마랑 같이 꺼내 보면 더 좋을 거야.” 그리고 그때마다 조금씩 더 행복해질 것이었다.

늦봄, 서울 하늘에 드물게 맑고 붉은 노을이 걸린 날이었다. 잊지 못할 목소리, 잊지 못할 순간.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유한 향기와 소용이 있다. 그 자체로 이미 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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