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박상수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욱 오염돼야 한다”
[작가의 말] 박상수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욱 오염돼야 한다”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8.08.14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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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은 소설집 등 책의 맨 뒤 또는 맨 앞에 실리는 ‘작가의 말’ 또는 ‘책머리에’를 정리해 싣는다. ‘작가의 말’이나 ‘책머리에’는 작가가 글을 쓰게 된 동기나 배경 또는 소회를 담고 있어 독자들에겐 작품을 이해하거나 작가 내면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에 독서신문은 ‘작가의 말’이나 ‘책머리에’를 본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발췌 또는 정리해 싣는다. 해외 작가의 경우 ‘옮긴이의 말’로 갈음할 수도 있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돌이켜보면 첫 평론집 이후, 2012년에서 2017년까지 내 관심은 우선적으로 우리 사회의 변화에 있었던 것 같다. ‘국가 없는 국가’(지그문트 바우만)의 등장과 가속화,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타인/공동체/사회’의 실재감이 상실돼가는 상황, 악화돼가는 노동 현실 및 경제 조건, ‘격차 사회’에서 더 막막한 ‘장벽 사회’로의 이동, 그리하여 더더욱 생존에만 매몰돼가는 삶,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기대조차 점점 사라져버리는 현실에 대한 끔찍한 감각이야말로 지난 시간 나를 지배해왔던 것들이었다. 특히 시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국가를 자신의 수익 모델로 삼거나,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통치하려는 정치 권력의 등장은 우리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시를 읽으며 우선적으로 채택한 렌즈라는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로 사회, 계급, 정체성 세대, 청년, 일상, 노동, 미, 세계와 같은 단어들이었다. 그것들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지금 한국시에 어떤 배경과 힘이 작동하고 있는가를 탐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지점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언어와 언어 간의 사이, 언어와 시인의 사이, 시인과 세계의 사이, 나와 이 시집의 사이, 결과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그물망 같은 겹의 힘과 콘텍스트에 대해 더 큰 궁금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사이’의 힘들을 규명한다면 보이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많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우리 시대의 무의식을 포착하는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수한 싸움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시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나의 이런 작업들이 편협한 세대론이자 시의 무한한 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정지시키고, 시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사회학에 종속시킨 작업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시를 사랑하면서도 의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가설과 검증,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성찰의 프로세스를 거치고 나면 이상하게도 지금 읽히고 있는 한국 시를 무조건 윤리적으로 옹호할 수만은 없는 이상한 지점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를 사랑하지 않는 일일까? 비평은 언제나 아무런 소란 없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시의 위의와 가치를 발굴하는 일에만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일까.

시를 사랑하되 시의 자유와 권능을 너무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고민 끝에 다다른 나의 잠정적 소결이었다. 시적 자유와 권능을 끝까지 믿는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 끝없이 자문해야 하는 것이며, 때로 그 믿음을 너무나 손쉽게 우리 자신의 자유와 권능으로 되돌리는 일은 특히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순수의 이름으로 타인과 삶을 착취할 수 있다. 우리는 더욱 순수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더욱 오염돼야 한다.


■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박상수 지음|문학동네 펴냄|480쪽|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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