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
  • 신금자
  • 승인 2007.07.31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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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자[수필가 · 독서신문 편집위원]
▲     © 독서신문
 베르사유궁전 정원의 넓은 호수에 자잘하게 내린 햇빛이 좋았다.
더러 기억하기를 제1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고 ‘베르사유조약’을 맺었던 ‘거울의 방’을 거닐며 잠시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려본 적이 있다. 그녀가 단두대에서 이슬처럼 사라져갔지만 당시 애통해하는 이 있었던가. 순간, 왜 그녀가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지 그녀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혹여 앙투아네트가 그 전후 사정의 아픔을 알고 조금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이렇듯 음탕하고 사치스런 왕비로 몰려 처형당하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으리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살의 나이에 난생처음 파리에 왔다. 부르봉왕조의 화려한 역사가 깃든 베르사유 궁전에서 앙투아네트와 루이16세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긴 세월 앙숙관계였던 두 나라의 화평을 위해서 적국의 왕자와 공주가 어렵사리 맺어졌다.

 정략적인 결혼생활은 의사소통부터 둘의 성격이나 취향, 그리고 자라난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다. 궁이라 맘껏 누릴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그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하고 먹고 입는 일마저 법도와 시중드는 귀족들의 까칠한 간섭이 따랐다. 비교적 자유로운 합스부르크 왕가와는 달리 프랑스 왕가의 법도는 정교한 예절과 풍습을 따라 귀족들로 구성된 수행원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를 옥죄었다. 
 그리고 루이16세가 결단력이 부족하고 뻣뻣하기만 한 반면 앙투아네트는 무척 섬세하고 즉흥적이었다. 파란 눈에 금발인 앙투아네트의 미모는 눈이 부셨지만 그는 무뚝뚝한데다 신체의 결함을 이겨내기까지 앙투아네트를 사랑하는데도 인색했다.
한편, 베르사유 성은 항상 열려 있었다.  프랑스인은 물론, 프랑스 왕을 존경하는 외국인들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궁전과 왕의 침실, 그 가족이 식사하는 것까지 개방하고 있어서 왕족이라도 사생활이 없었다. 궁 바깥물정을 도통 모르던 그녀를 민중 속에 던져 놓았으니 늘 그들을 의식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오죽했으랴. 사치스런 투정 같지만 결코 만만찮은 환경이다.

 결국 앙투아네트는 천성이 가볍고 천진한 10대답게 고감도의 예술적 무거운 주제보다 패션과 문화에 관심을 두었을 터이다. 엄격한 궁중 법규를 잘 지키며 사는 그가 잠든 시간에 그녀는 오페라, 무도회, 게임을 즐겼다. 말하자면 군중 속 고독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놀았다. 프랑스 왕실의 행사에도 잘 나서지 않았다. 특히 루이 16세에게서 ‘트리아농’ 궁을 선물 받은 뒤로는 거의 그 곳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그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경직된 베르사유 궁의 사람들보다 서로 소통이 잘 되고 편한 트리아농 궁에서의 친교를 더 원했던 것 같다.  
 이 트리아농 궁은 숨고 싶은 그녀를 꼭꼭 숨겨줬다. 어쩌면 루이16세가 어느 정도 눈감아준 사생활이 국민들의 눈에 나쁘게 비쳤다. 국민을 무시한다는 부정적 여론과 억측에 가까운 염문들이 점점 사치스럽고 음탕한 왕비로 몰아갔다. 루이16세의 신체적 결함으로 아이를 갖지 못했을 때도 그리고 그가 그것을 완치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도 앙투아네트를 의심하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래서 순수혈통을 보겠다는 프랑스왕실 법도에 따라 앙투아네트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그런 그녀가 트리아농 궁 주변으로 목장을 조성하여 닭과 오리를 풀어놓았다. 어린 시절 왕녀로 어쩌다 우유를 짜본 목가적인 전원생활의 환상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앙투아네트의 다른 그리움을 프랑스인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곳에 '왕비의 촌락' 이란 푯말을 박고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하긴 베르사유 궁전보다 훨씬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왕비의 촌락' 과 트리아농 궁을 보면 그녀가 사치한 왕비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끝없이 너른 베르사유 성 안의 여러 궁전들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다. 방이 8개 딸린 규모로 단 몇 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 다만 집기류에서 고급한 앙투아네트의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정도다.

 혁명의 근원적 발생 동기는 철저한 신분제의 차별에서 기인했다.
루이 14세가 한 마을에 불과한 베르사유에다 궁전을 지으면서 적당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왕족과 어울릴 수 있는 귀족들과 돈 많은 영주들을 더러 수용할 수 있도록 궁전을 증축했다. 그리하여 많은 귀족들과 다채로운 연회와 무도회를 열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방탕한 가운데 계속되는 화려한 건축예술의 기치로 국고는 텅텅 비어갔다. 그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왕실이 귀족들에게 과세를 하려다 화를 불렀다. 반발하던 일부 귀족들이 귀족, 성직자, 평민들로 구성된 삼부회의를 열고 그 삼부회의가 국민회의로 개칭되어 프랑스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곳에서 국민들이 원하는 헌법과 법이 제정되자 루이16세가 군대를 베르사유로 집결시켰다. 봉건적 이해관계를 희생시키더라도 효율적인 국가기구를 설치하도록 진로를 조금씩 터주며 최소한 왕정유지를 해야 했으나 이 같은 대응에 국민들의 불안이 분노로 번졌다. 이런 위기에서 마리도 이전과 다른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왕당파들과 비밀리에 왕정복고를 꾀하고 루이16세를 부추겨 봉건제도 폐지를 막고 프랑스 왕실의 절대권한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심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친정 오빠에게 프랑스를 쳐서 반혁명전쟁을 일으켜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해 혁명세력들의 눈엣가시가 된 것이다.

 앙투아네트의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의 뜻을 절대 이룰 수 없는 나라의 왕비라는 사실을 간과한 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일본의 만행을 잊지 못하듯, 당시 프랑스 사람들도 합스부르크 왕가를 쉬 용서할 수 없어 항상 으르렁댔다.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 중에 아버지나 남편, 오빠 등을 잃어 적대감이 깊은 나라 출신의 왕비에 대해 좋은 감정일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빵을 달라는 군중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고 했다든지 지지부진한 재판을 받쳐줄 죄목으로 아들에게 성적 유희를 가르쳤다며 어린 아들을 증인석에 세운 일, 그녀의 혼외정사를 무분별하게 퍼뜨리다 급기야 ‘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으로 마리가 추기경과 불륜 관계라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만들어졌던 만큼 앙투아네트에 대한 재판은 하나마나였다.

 명석하다고 하는 인간의 두뇌도 사전에 형성된 이미지를 조금 물리기가 어찌 그리 어려운가. 그녀의 삶과 문화에 다소 호의를 베푼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심층적 패러독스에 주목한 주의 깊은 음미가 필요하다. 사실은 멸망의 위기에서도 자꾸만 옛 왕궁으로 존속할 희망을 놓지 못한 자기 연민이다. ‘승자는 벌을 받을 각오로 살다가 상을 받고 패자는 꾀를 부리다가 벌을 받는다.’고 하더니 딱하다.
 
읽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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