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살림도 아이의 놀이가 된다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살림도 아이의 놀이가 된다
  • 스미레
  • 승인 2021.01.2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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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살림을 도와주러 오시던 이모님이 계셨다. 화통하고 쾌활한 분이셨는데, 청소에 방해가 되어서인지 아이가 집에 있는 걸 못 마땅해하셨다.

“남자애가 살림 건들어서 뭐 해? 주부 될 거야? 훌륭한 사람 되려면 학원에 가던가 책을 봐야지!”

그 말씀에 수긍하지 않았다. 물론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서 이러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부가 어때서요?’라고 정면 반박도 못 했지만.

아이는 두 살 때부터 청소기에 관심을 보였다. ​굉음에 놀라기는커녕 청소기를 졸졸 쫓아다니며 돌려보고 싶어했다. 무거울까 걱정했지만 웬걸, 아이는 힘이 장사였다. 그때부터 청소기는 아이 몫이 되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기를 돌리고 가전 매장을 찾았다. 남편은 선풍기와 반대인 진공청소기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아이와 같이 필터를 갈았다.​ 아이가 그 작업을 좋아해서 청소기 필터를 일주일에 두 번씩 갈아치웠던 기억이 난다.

“이 로봇 청소기는 사이클론 방식인가요? 먼지는 비중이 크거든요. 비중이 클수록 원심력도 크니까 공기는 팬으로 나가고 먼지는 벽 쪽에서 돌아요. 필터는 스펀지 필터예요?” - 영재발굴단 중에서.

아이가 관련 원리를 술술 이해했던 것, 필터 청소기와 최근 산 필터 없는 청소기를 정확히 비교하는 것도 그런 경험이 쭉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아이는 요즘 다이슨보다 더 혁신적인 청소기를 만들겠다며 책을 읽고 발명 노트를 적는다. 자기는 청소를 많이 해봤으니 청소기도 잘 만들거라 자부한다.

아이는 세탁기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다. 스툴을 놓고 앉아 세탁기가 작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에게 빨래의 역사, 세탁기의 원리, 옷감에 따라 세탁 코스가 다른 이유, 애벌빨래의 의미 등을 알려줬다. 세탁 코스별로 걸리는 시간을 함께 그래프로 그려보기도 했다. 아이가 드럼 세탁기에 대해 빠삭하게 알게 되었을 때 중고 가전 매장에 들러 통돌이 세탁기를 보여줬다. 드럼 세탁기만 보고 자란 아이에게 통돌이 세탁기는 새롭고 신기한 기계였다. 아이는 곧장 드럼 세탁기와 통돌의 세탁기를 비교하고 그 차이를 설명했다.

관찰력도 익숙한 것에서 싹 튼다. 그렇게 몇 년간 세탁기를 관찰하던 아이는 멀리서 세탁기 소리만 듣고도 세탁기가 지금 뭘 하는지, 몇 분 후면 멈출지를 알았다. “엄마, 이제 헹굼으로 넘어왔어요. 30분 후면 (끝났다는) 노래가 나올 거예요.” 요즘도 아이는 세탁기를 관찰한다. 뭘 느끼기라도 하듯 간간이 귀나 손을 대보고, 세탁기 필터를 닦아주기도 한다.

나는 나대로 세탁실이 추우면 아이에게 담요를 둘러주고, 어두워지면 세탁기 문에 손전등을 달아줬다. 때론 조용한 음악을 틀어주기도 하는데 세탁기와 아이, 베토벤이 있는 그 풍경에 종종 마음을 뺏기곤 한다.

오후엔 주로 놀이를 가장한 집안일을 하는 게 우리의 일과였다.‘이불을 누가 더 반듯하게 갤까, 떨어진 색종이 누가 더 많이 모으나’처럼 아이의 경쟁심을 자극하면 반응이 쏠쏠했다.

그 외에 밀대로 하키를 하며 걸레질하기, 색깔과 크기별로 빨래 널기, 빨래통에 빨래 골인시키기, 신발 집에 보내주기(신발 정리), 재활용품 분리하기 등도 좋은 놀이였다. 이때 집안일의‘효율’을 기대하면 화만 난다. 그보다는‘효용’, 그러니까 아이가 집안일을 통해 인내심 있게 어려움에 도전하고, 협동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대하는 편이 나았다.

특별한 계획 없고 체력도 괜찮은 날, 아이와 집안 사물들을 느긋하게 들여다본다. 세탁기도 코스별로 돌려보고, 서랍도 뒤져보며 아이가 원하는 것부터 하나씩, 그저 함께 해보는 것이다.

혹여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어떻다해도 비판하지는 않는다. 아이의 마음을 흔드는 것들은 대개 사소하지만 그걸 대하는 아이의 마음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이가 수용하기 쉬운 세계가 어떤 형태인지 들여다보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호기심을 가져본다. 멀고 대단한 것을 아쉬워 말고 주변의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이의 세계를 더 크게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길일 테니까.

‘살림 사랑꾼’ 아이 덕에 수 없는 물건을 주워 나르고 분해하고 조립했다. 집안일다운 집안일은 꿈도 못 꿨다. 어느 날은 이렇게 육아하는 내가 답답해서, 어느 날은 너절한 집안 꼴에 한숨이 났다. 돌아보니 아이는 집을 어질렀던 게 아니라 자기 세계를 펼쳐놓은 것이었다. 살림을 망가트린 게 아니라 그 물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제 본능대로 세상을 배우며 탐험하는 중이었음을 이제야 어렴풋이 안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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