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폼장]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부모가 된다는 것』
[지대폼장]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부모가 된다는 것』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06.25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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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우리는 15년 전에 만났고 10년 전에 딸을 낳았으며 3년 전에 아들을 낳았다. 철학자와 문예학자이기에 우리 부부는 아침 식탁에서 (아이의 턱받이를 채워주고, 엉망이 된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며, 떨어진 바나나를 집어 올리면서) 올바른 교육과 식생활 이야기만 나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부모 노릇의 철학적 차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토론한다. 아이를 낳으면 부부의 사랑도 더 커질까? 아니면 아이가 부부의 사랑을 대체할까? 부모가 되면 시간 감각이 어떻게 변할까? 엄마의 주도적 역할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런 온갖 생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자랐고 기록도 쌓여갔다. 〈8~9쪽〉

다시 시작된다. 내장 저 안쪽에서, 저 멀리서 통증이 굴러온다. 가까워질수록 격렬해진다. 이제 곧 몇 초만 있으면 끔찍해질 것이다. 셋, 둘, 하나… 통증이 내 몸을 관통하며 온몸을 찢어발길 것만 같다. 내 안에 있지만 내 몸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큰 그 무엇처럼. 게다가 예리하고 뜨겁기까지 하다. 내 몸이 찢어지기 직전 통증은 다시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커다란 비명이 되어서.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내지르는 비명이지만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통증뿐이다. 모든 것을 넘어서는, 모든 상상과 모든 설명을 넘어서는 통증! 〈29쪽〉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신경이 곤두선다. 호흡은 빨라지고 심장은 세차게 뛴다. 영롱한 감정이 열기 없는 불길처럼 명치에서 솟구치고, 차가운 불꽃이 흉곽 전체로 퍼져나간다. 뜨겁게 타오르지만 집어삼키지는 않는…. 맞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갓 태어난 딸에게 푹 빠진 것이다. 부채처럼 넓은 양쪽 귀마저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병원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오래 기다렸던 데이트를 앞둔 남자마냥 너무너무 설레고 행복하다. 〈53쪽〉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제일 친한 친구들과 척을 질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관계가 망가질지도 모른다.(아니야. 말도 안 돼!) 번듯한 직장을 구할지도 모른다.(확률은 낮지만 어쨌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유연하고 변화 가능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변할 수 없다. 이 깨물어주고 싶은 작은 존재는 영원히 나의 자식이다. 몸이 커져서 깨물어주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어느 날 내게서 등을 돌리고 연을 끓어버린다고 해도 이 아이는 내 인생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67쪽〉

그러니 이제 어쩔 것인가? 지구를 생각하면 자식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해결 방안이겠지만, 이것은 (부모가 되는 것이 행복이요, 자아실현이라고 생각할 의향이 있다면) 개인의 행복과 삶의 실현을 가차 없이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이 딜레마는 또 한 가지 역설을 동반한다. 새 지구인이 탄생할 때마다 전체적으로는 지구 재앙의 속도가 빨라질지 모르지만 개인의 출산은 세계 몰락을 최대한 연기시키겠다는 강력한 동기가 되기도 한다. 자식이나 손자가 없는데 누구를 위해 환경을 지키겠는가? 〈86쪽〉


『부모가 된다는 것』
스베냐 플라스푈러·플로리안 베르너 지음 |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펴냄│248쪽│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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