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식 배달원 알아도 옆집 사람은 몰라… ‘관태기’ 만연
야식 배달원 알아도 옆집 사람은 몰라… ‘관태기’ 만연
  • 권보견 기자
  • 승인 2018.01.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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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 송년회보다 중요한 ‘좋아요’
<사진출처=연합뉴스>

[독서신문 권보견 기자] 집들이, 돌잔치, 송년회 등 모임이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날 모이는 친척들의 수도 줄어들고 있다. 예전에는 당연시되던 대학 MT도 예외는 아니다. 젊은 세대들이 정(情)을 나누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피곤하다고 호소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관태기(관계+권태기)’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관계 가성비’ 따지는 ‘나홀로족’ 늘어

요즘 젊은 층에서 관태기 현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방송인 허지웅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했다. 지난해 8월 허지웅은 온스타일 <열정 같은 소리>에 출연해 “나는 관태기인 것 같다. 이혼 이후 계속 관태기였다. 몇 년 동안 계속 지속돼왔다”라고 고백했다.

‘관태기’는 ‘관계’와 ‘권태기’를 합성한 신조어로, 관계를 형성하고 인맥을 관리하는 데 피곤함을 느끼는 현상을 뜻한다. 이는 ‘대학 내일 20대 연구소’가 2015년 말 발표한 ‘2016 20대 트렌드 리포트’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와 같은 관태기 현상이 만연해지면서 ‘혼밥’과 ‘혼술’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아졌고, ‘관계 가성비’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2016년 전국 만 15세 이상 남녀 1만 602명을 대상으로 한 '2016 국민 여가활동 조사'에 따르면 혼자 여가 활동을 하는 사람이 56.8%에서 59.8%로 증가했다. 특히 20대 이하에서는 70% 이상이 혼자 여가 활동을 한다고 답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비율은 2014년 32.1%에서 29.7%로 떨어졌다.

회사가 몰려 있는 서울 중구의 한 음식점은 "예전에는 회사에서 수십 명씩 오는 단체 손님이 대다수였지만 최근 몇 년 새 예약 건수가 줄고 있다"고 말했다. 송년회·신년회 대신 혼자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혼말족·혼초족(혼자 연말을 보내는 사람·혼자 연초를 보내는 사람)' 같은 신조어도 탄생했다.

다음소프트 빅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에서 송년회의 언급량은 2014년 7만 3,811건에서 2016년 5만 2.042건으로 매년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달 초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2,88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6.3%가 송년회 참석을 부담스러워 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굳이 모임을 만들어 돈독한 관계를 갖는 것이 사회생활 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한 관태기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모임도 비용 편익을 따져 참석한다. 『트렌드 코리아 2018』 공동 저자인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주거학과 교수는 "요즘 사람들은 '관계 가성비'(관계를 유지하는 데 투자하는 비용·수고 대비 관계로부터 얻는 효용·만족도)를 따진다"고 말했다. 가성비가 낮다고 생각되면 굳이 과거처럼 직장 동료, 학교 친구 등 관계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고강섭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람들 간의 모임이 예전에는 사회 신뢰를 바탕으로 했다면 지금은 도구적 관계가 됐다"며 "토익 스터디, 취업 스터디와 같이 목적 달성을 위해 모이고, 본인이 생각한 관계가 아니라면 바로 해체해버린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관계 맺기에 지쳐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관계에서도 가성비를 다지는 이들이 늘고 있는 건 관계의 깊이보다 ‘넓고 얕음’의 인맥 쌓기에서 오는 피로감 때문으로 분석됐다.

이민아 중앙대 교수가 2013년 발표한 ‘사회적 연결망의 크기와 우울’ 논문에 따르면 하루에 접촉하는 사람이 50명 이하일 때는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우울함의 수준이 낮아졌다. 하지만 50명 이상 접촉한 경우엔 많이 만날수록 우울함의 수준이 높아졌다.

모임 위축 넘어 이웃과 담쌓아

관태기 현상은 돌잔치·송년회·동창회 같은 모임 불참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조선일보가 지난해 12월 20대 이상 성인 170명을 대상으로 '옆집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도가 어떤 사람과의 친밀도와 비슷하냐'고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모르는 사람'(40.2%)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이었다. '배달 아르바이트생'(11.8%), '타 부서 직원'(22.5%) 정도로 생각한다는 대답도 많았다.

마을 주민들의 만남의 장이었던 반상회 또한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반상회는 지난 1976년 행정기관 주도형으로 도입됐으나, 정부가 1997년 반상회 운영의 자율화 등을 권고하면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웃 간 ‘상부상조’하는 문화 역시 자취를 감추고 있다. ‘2016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위급상황 발생 시 이웃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응답은 62.4%로 10년 전(72.7%)보다 10.3%포인트 떨어졌다.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주거학과 교수는 "이웃 도움이 없어도 대신해 줄 수 있는 상품 서비스가 많아져 이웃과 잘 지낼 필요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녀 교육은 학원에서, 육아는 정부나 업체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회사나 학교에서 지친 젊은 세대가 일상에서까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 한다는 분석도 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요즘 젊은 세대는 이웃 공동체란 개념이 거의 없다"며 '마을·동네'를 하나의 필수적 공동체로 인식해 이웃과 잘 지내야 한다고 여겼던 위 세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아파트 위주의 주거 환경도 이웃과의 관계 단절을 부추기는 요소 중 하나다.

‘관계 맺기’,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관태기 현상은 만남의 형태를 바꿔 놓았다. 관태기에 빠진 젊은 세대가 인연을 끊고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라인에서는 인간관계에 더 목을 맨다. 인스타그램의 ‘좋아요(공감 기능)’ 같은 반응을 얻기 위해 사생활을 노출하고 자극적인 내용을 업로드 한다. 직접 만나야 하는 동호회 활동 등에서는 자신의 신상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일회성 모임을 선호한다.

젊은 세대들의 소셜 미디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관종(관심이 필요한 사람)'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자신의 일상을 거의 매시간 소셜 미디어에 알리거나, 팔로워 반응을 얻기 위해 일상을 꾸미거나 과장해 올리는 현상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단어다.

젊은 세대들이 오프라인 관계보다 온라인 관계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어야 하는 오프라인 관계보다 온라인에서 호응을 얻는 게 훨씬 쉽고 빠르다"며 "오프라인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인정(認定) 욕구'를 온라인에서 채우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인이나 가족과 가는 것이 당연했던 여행조차 전혀 모르는 사람과 함께 간다. 애플리케이션 ‘N소모임'을 통해 일행을 모집하고, 숙소와 교통비용을 나눠 돈을 절약한다. 'N소모임’은 모집자가 날짜와 장소 등을 정해 모임 모집 글을 올리면, 참석 버튼을 누르고 참석하는 방식이다. 최근 100만 건 넘게 다운로드 됐고, 하루에 수백 개씩 모임 모집 글이 올라오고 있다.

‘나홀로족’, ‘관태기’, ‘관계 가성비’와 같은 신조어가 탄생하고,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의 소멸은 도시화와 압축된 산업화, 핵가족화, 개인주의화, 인터넷의 일상화 등 사회구조 및 생활상의 변화가 주요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원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연구본부장은 “오늘날 한국 사회처럼 경쟁을 부추기는 각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생존을 위해 저마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적어지고 관계가 도구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며 “이 같은 사회 관계망의 붕괴는 결국 개인의 삶의 질과 사회통합을 위협한다”고 말했다.

인맥 맺기에 지친 사람들의 관계망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SNS를 통한 관계는 피상적이고 얄팍한 관계들이 대다수다. 인맥 맺기에서 오는 피로감의 원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오프라인 등을 통해 관계를 맺기 위한 소모적인 시간을 줄여 자기가 누군지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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