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유전성 혹은 현실적 질서의 유동성
만물의 유전성 혹은 현실적 질서의 유동성
  • 최용석
  • 승인 2008.11.2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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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경의 「일식」
▲     © 독서신문
이혜경은 스물셋에 등단하여 ‘오늘의 작가상’, ‘한국일보 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여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일찍부터 입증해 보인다. 화려한 문학적 이력만큼이나 다양한 서사 세계를 기대하게 되지만 독자가 만나는 것은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가족주의’다. 그것도 현란한 수사나 이미지가 아닌, 친근감과 편안함을 풍기는 일상적인 글투다. 그 배경으로 작가의 일기 쓰기를 통한 글쓰기 연마 사실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따뜻하지만 감상적이지 않고, 다감하면서 또한 치밀하며, 충만하되 결코 넘치는 법이 없다”는 작품 평은 이런 문체적 특성에서 연유하는 듯 싶다. 가족과 관련한 문학적 화두의 경우,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작가의 태생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가부장제는 제가 경험한 이야기예요. 저희 세대까지도 가부장제를 경험한 집안 이야기가 많아요. 사람이 태어나서 관계를 맺는 원초적인 지점이 가정이잖아요. 그 속에서 뭔가 잘못되고 가치를 획득하지 못하면 결국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죠. (중략) 저희 집에도 남녀차별이 있었는데, 저는 막내라서 딸 중에서 혜택 받은 경우예요. 언니들의 배려 덕분에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에서 공부했으니까요.(하략)” 

가족은 개인의 원활한 일상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단위다. 바꿔 말해 개인은 가족을 통해 온전한 삶을 위한 다양한 욕구를 해결한다. 특히 가족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은 정서적 위안을 포함한 정신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개인의 세계관 구축에 깊숙이 개입한다. 가령, 가부장제의 억압적 질서로 빚어진 특정 정서나 관념이 개인적 삶의 원리로 존재할 가능성은 농후해 보인다. 작가의 경우, 가족 간의 상호작용이 서사적 담론의 원천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단편 「일식」은 그 좋은 사례라 할 만하다.

대부분의 가족 관련 소설이 그러하듯,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작중의 남편 혹은 아버지는 통상 부정적인 포즈를 취한다. 설령 이들 가장(家長)의 권위가 부당할지라도 가족 구성원은 그것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 인물이 현실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설정된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이 때, 독자는 이들의 의미망을 통해 부당한 현실적 질서의 폐단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설정에서 「일식」의 남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까 아내의 극복 대상인 남편은 부당한 현실적 질서에 대한 표상으로 읽힌다. 그런가 하면 남편과의 이혼은 현실적 질서에 대한 반기의 의미망을 담아낸다. 그런데 부당한 질서일지라도 사회적 구속력을 지닌다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힘을 갖는다. 이런 연유로 이혼을 감행할 경우, 아내는 경제적 궁핍과 정서적 황폐화는 물론, 주변의 따가운 시선 등 현실적 고통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징성을 지닌 남편은 물론, 그 아내도 정상적인 가족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인물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삶, 즉 가족적인 삶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의 일그러진 일상은 건강한 가족적 삶에 대한 탐색에 적절히 부응할 뿐이다. 작가의 가족 관련 작품이 “가족주의의 온전한 복원도 아니며, 그렇다고 가족의 전면적인 부정도 아닌 회색지대를 고수”하고 있다는 진단은 그래서 설득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을 화두로 삼는 「일식」은 작가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체험을 토대로 오랜 기간 구상을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살았지만, 인도네시아 인을 본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그것은 인도네시아 체험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적 질서에 대한 열린 시선을 제공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일식」은 일상을 좌우하는 현실적 질서에 대한 서사적 탐색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 첫 장면은 주인공 ‘영월’이 인도네시아어 과외 선생 ‘다마이’와 함께 일식으로 실명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     © 독서신문
일식을 보다 눈이 먼 사람(마스똥)을 찾아가는 것은 영월의 바램이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고 차라리 못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를 찾아가는 것은 영월에게 있어서 일종의 도피인 것처럼 보인다. 금단의 영역을 넘으려다 눈이 멀어버린 그를 찾아서 스스로 위로 받고 편안해 질 거라는 기대인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마스똥을 찾는 이유는 남편이 빛을 잃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초조함 때문이었다.


‘일식 현상을 직접 육안으로’ 바라보는 행위는 현실적 질서에 대한 일탈에 비견할 만하다. 유부남과의 불륜이 비극적 종말을 초래했듯, 강력한 햇빛이 실명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일식으로 망막이 타버린 사람을 생각하면서 ‘영월’이 막연한 동경과 연민의 양가적 감정에 휩싸인 까닭은 그 사람에 비추어 자신의 과거에 이어 현재와 미래의 자화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영월’은 유부남과 불륜에 빠진 적이 있다. 그녀는 현실적 질서보다 유부남과의 사랑의 감정에 더 충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레스토랑에서 가족과 더불어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는 유부남을 훔쳐보면서 그녀는 엄연하게 존재하는 현실적 질서의 장벽을 절감한다. 당시 당혹감에 혼미해진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그와의 이별에 대한 직감일 수 있다.

이후 그녀는 ‘금세기 마지막 개기일식’이 일어난 인도네시아에서 일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 없는 결혼을 감행한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영월은 남편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장을 보고 남편의 상차림에 신경을 써도 그건 일에 대한 몰입일 뿐이다. 남편의 외도도 지나칠 정도로 그녀는 남편에게 무관심하다. 사정은 남편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불행은 부당한 현실적 질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그녀의 경직성에서 연유하는 측면이 크다. 달리 말해 그녀가 겪는 고통과 좌절의 이면에는 불륜에 따른 죄의식을 과도하게 부과한 경직된 자의식이 존재한다. 결국 ‘영월’의 삶은 부당한 현실적 질서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이 가부장제적 질서를 포함한 현실적 질서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비극적 정황은 20세기 마지막 개기 일식 당시 실명인의 운명과 겹치면서 새로운 의미망을 획득한다. 현실적 질서에 내재되어 있는 유동적 성격에 대한 성찰이 그것이다.

그녀가 고통과 고뇌를 감수하면서까지 현실적 질서에 저항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찰의 힘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정을 듬뿍 쏟았던 도마뱀의 죽음이 호출한 상념이 그녀에게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즉 고독을 달래주었던 도마뱀의 죽음이 ‘한차례 혼돈을’ 안겨준 반면, 그녀의 내적 성숙을 이루게 한 것이다. 그녀의 독백은 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날 밤, 책상 앞에 옴쭉도 않고 앉아 기다린 끝에 영월은 새 찌짝의 몸 빛깔이 죽은 찌짝에 비해 붉은 기가 돈다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한차례 혼돈을 겪은 마음은 이미 죽은 찌짝에게서도 떠난 뒤였다. 마음의 그 간절함도, 지나고 나면 헛것이었다.
 
도마뱀의 죽음이 암시하듯, ‘마음의 간절함도, 지나고 나면 헛것’일 수 있다. 자신을 옥죄던 과거의 아픈 기억 역시 그녀의 뇌리에서 아주 지워질지도 모른다. 소중한 대상에 대한 간절함조차 다른 사소한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의 세계로 떠나갈 수 있다. 이런 상념에 잠기면서 영월은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둔 눈물을 쏟아낸다. 뜻밖에도 그녀는 따뜻함과 포근함을 체험한다. 그것은 만물이 유전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스레 절감했기 때문일 수 있고, 현실적 질서를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 결과일 수 있다.

‘영월’이 실명한 사람을 찾아 나선 연유는 여기서 밝혀질 수 있다. 실명한 사람과의 만남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다. 그건 그녀의 불투명한 장래가 초래할 어둠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달리 말해 그녀의 방문은 정서적 위안보다는 실천적 용기의 확보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도중에 ‘영월’의 방문은 중지된다. 이미 그녀의 결심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고통과 비난의 정도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그것을 감내할 용기와 힘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귀가 도중, 그녀는 뙤약볕 아래서 듣는 이 없는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한 소년과 마주한다. 소년의 영상에서 그녀 자신만큼이나 미래가 불투명한 ‘다마이’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족 부양을 책임지고 있는 ‘다마이’로서는 경제적 문제가 심각한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가족은 결코 위로와 안식의 공급원이 아닌, 자신의 삶을 옥죄는 무거운 족쇄일 뿐이다. 결혼 상대인 ‘토니’ 역시 궁핍하여 그녀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샤하르’는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녀가 턱 없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한국행을 고집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한국행은 궁핍한 현실로부터의 탈출구인 동시에 현실 도피의 일환인 셈이다. 따라서 그녀의 선택은 물질적 탐욕보다는 냉혹한 현실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다마이’는 부유한 ‘샤하르’를 결혼상대로 택한다. ‘영월’은 자신의 미래와 마찬가지로 이런 그녀의 앞날이 ‘어둠 속을 더듬어가’는 것처럼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본다. ‘다마이’가 한국행과 배우자 선택에서 보여준 것처럼 ‘영월’은 자신의 결단도 현실 도피의 한 방편에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의 결심이 현실 도피의 일환에서 취해진 것이라면 그건 삶의 실패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녀가 ‘다마이’는 물론, 자신의 미래와 관련하여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영월’의 선택이 삶의 성찰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마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는 「일식」에서 우리 삶의 경직되고 편협한 면면을 깊고 넓은 인식의 장으로 인도하는 서사의 미덕을 확인할 수 있다. 연이어 차분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스토리텔링의 재미를 일구어 내며 메시지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서사체의 울림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 울림이 더 큰 공명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독자는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 최용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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