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다시 하는 월동 준비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다시 하는 월동 준비
  • 스미레
  • 승인 2023.01.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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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년 내내 겨울을 손꼽으며 살 만큼 겨울을 귀애하는 사람이다. 숲과 닿은 부엌 창틈으로 맑고 청량한 공기가 스며오면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랄까. 바로 그날부터, 신이 나서 월동 준비에 들어가곤 한다.

말이 좋아 월동 준비지 기실 소꿉장난과 다르지 않다. 천상 바지런한 아낙은 못 되어서 어느 집 누군가처럼 포기포기 김장을 하거나 식구들 겨우내 입 다실 찬거리를 종류별로 마련해 두진 못하지만, ‘딱 내가 즐거울 만큼의’ 루틴은 제법 가지고 있다. 봄철 넣어둔 스웨터와 솜이불, 가족들의 외투와 장갑 등을 포근히 준비해두고 아로마 향과 겨울철 실내악을 챙겨두는 등의 소일을 달게 하며 겨울 마중을 하는 것이다.

아이와 내가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계절도 겨울이다. 활동적인 아이의 독서는 겨울에 집중되기 마련이라 나 역시 겨울잠 준비하는 곰처럼 늦가을부터 조금씩 책 읽어줄 채비를 한다. 편안한 실내복과 머리맡에 두고 마실 차를 구비하고 아이와 내가 함께 많이 웃을 수 있는 책들도 찬찬 모아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즐겁게 책을 읽어주고자 하는 ‘마음’도 새삼 꺼내어 쓰다듬어 본다.

그렇게 반가이 맞이한 겨울이건만, 겨울 하루는 대개 너무하다 싶을 만큼 길었다. 난장판인 집안에 세수도 안 한 우리는 또 얼마나 꼬질꼬질했는지. 하지만 놀랍게도 아이와 함께하는 겨울의 집에선 따스한 풍경이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따끈한 바닥에 엎드려 책 보기, 뜨거운 물에 노란 유자청 휘휘 저어 마시기, 캐롤 틀고 춤추기, 추운 날 뛰어 들어와 이불 속에 쏙 파묻히기, 아이를 재우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에 홀연 날리는 하얀 눈. 귤이나 군고구마 같은 간식거리를 들고 온 남편의 차가운 손을 잡고 코트 깃에 묻은 알싸한 겨울 냄새를 맡는 것은 내가 꼽는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기도 하다.

올해도 그렇게 조용하고 고단한 겨울이다. 세끼 김 오르는 부엌과 아이와 내 자리를 바삐 종종대는 엄마의 하루는 왜 이리 멀고도 짧은지. 아이와 귤 바구니 나눠 안고 전기담요 속에 파묻혀 책을 읽는 저녁이 기다려지는 건 아마 그 때문일 테지.

엊그제는 아이와 『우동 한 그릇』을 읽었다. 내가 아이만할 때 나의 엄마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그 책을 나도 꼭 그렇게 내 아이와 함께 읽는 즐거움. 그때 내가 느꼈던 그 따스한 감동을 내 아이도 느끼고 있다는 그 풍요함에 기대 꼬박 며칠을 났다.

좋은 책이 으레 그렇듯 이 책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부분이 마음을 두드려온다. 올해는 유독 소설 속 엄마의 코트가 자꾸 신경 쓰였다. 척 봐도 추워 보이는, 그 오래된 얇은 코트. 그게 왜 이리 마음에 걸려 올까, 헤아리다 마침내 알았다. 내 월동 준비가 미흡했다는 것을.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그건 내 기호일 뿐 어떤 이에게 겨울은 매우 혹독한 계절이라는 것을. 내 가족만을 위한 마음 씀만이 월동 준비는 아니지 않을까, 란 생각을 겨울의 반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한다.

장갑과 목도리가 식구마다 준비되어 있고 먹을거리와 읽을거리를 풍성히 마련해 두었다 해서 마음이 따뜻해 오진 않는다. 눈 오는 날 입을 근사한 코트를 매만져보아도 넉넉함은 덜했다. 너무나 어리고 서툰 그런 온기는 마음속 추위를 내몰긴커녕 화롯불 근처에도 가지를 못한다. 한 해를 기다려 얻은 겨울을 만끽하면서도 왕왕 느끼던 공허함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터다.

겨울을 즐기기만 하던 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월동 준비, 다시 시작해야겠어’ 돌이켜 그렇게 생각했다. 겨울이 아직 한 움큼 남아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마음이 돌아섰던 사람이 있다면 화해를 해두고 미운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해내려는 노력도 내겐 좋은 월동 준비가 될 것이다. 바쁜 생활 속에서 자칫 내가 베푼 것보다 더 많은 걸 받았다 싶은 이에겐 겨울이 가기 전에 편지라도 써 볼 일이다.

가까운 가족과 친구에게 농담이랍시고 상처 준 일은 없는지, 너무 내 욕심만 부리며 밀어붙인 적은 없었는지도 더듬어 보고 싶다. 그렇게 마음의 그늘에 햇볕을 드리우지 않고서는 온전한 겨울 준비를 끝냈다고 나는 이제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주말엔 아이 손을 잡고 구세군 냄비를 찾고, 서울역 노숙인들께 핫팩을 건네고 돌아왔다. 떠오르는 몇몇에 전화를 걸고 더러는 편지를 썼다. 몇 해째 담아만 두었던 섭섭한 마음,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을 전할 적마다 마음은 환하게 개어왔다.

추운 날 바깥에서 애쓰고 있을 식구들에게 여느 때보다 자주 격려 메시지를 남겼다. 새벽에 오가시는 택배 기사님들을 위해 핫팩과 초콜릿을 놓아두었다. 예배당에 나가는 날이면 오늘도 매운 계절과 힘겹게 싸우고 있을 모두를 위해 잠시라도 기도했다.

추운 계절에 나누는 정은 그것이 다만 한 조각일지라도 각별한 것이었다. 미욱한 탓에 수많은 겨울을 보내고서야 그걸 느낀다. 물론 여기에 쓰기조차 부끄러운 몸짓이었지만 덕분에 이제야 조금은, 제대로 된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물색도 없이 겨울이 좋은 이유가 또 늘어 버린 나는, 이렇게 올겨울을 건너는 중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오늘이 춥지만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만큼 조금은 기특해진 것도 같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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