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없는 한 권의 책
글씨 없는 한 권의 책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1.06.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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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하늘이 잿빛으로 낮게 드리워진 초여름 오후다. 갑자기 우울함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이 감정에 함몰되는 게 왠지 꺼려진다. 흔히 ‘마음의 감기’라 일컫는 우울증이지만 매사 의욕을 잃게 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울함을 떨치기 위한 방편으로 아파트 앞 호숫가를 찾아 힘껏 뛰었다. 호숫가를 절반쯤 뛰다가 잠시 숨을 고를 때다. 호숫가 늪지대에 자생한 갈대가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진초록 잎사귀를 지닌 무성한 갈대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때 갈대들 속에 작년에 생장한 갈색 대궁의 갈대 모습이 듬성듬성 섞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 갈대를 바라보자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봤다. 혹여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어오면 금세라도 바스라질 듯 바짝 메마른 상태다. 그럼에도 지난 밤 몰아친 비바람에도 가녀린 대궁을 꺾이지 않고 온전히 본래 모습을 보전하고 있잖은가. 호숫가 늪지대에 새로 돋아난 싱싱한 진녹색 모습의 갈대들 틈에 끼어 그 위용(?)을 잃지 않고 있었다.

폭풍우 앞에서도 본색을 잃지 않는 오래된 갈대들을 바라보자 강인함마저 느낀다. 그야말로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결코 꺾이진 않잖은가. 어디 이뿐이랴. 이런 갈대 모습은 문득 김수영 시인 명시 ⸢풀⸥의 시어를 떠올리게도 한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몸을 뉘는 갈대 모습이 흡사 김수영 작품인 시 ⸢풀⸥에 표현된 시어와 유사해서다. 시 ⸢풀⸥의 시어에서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며 바람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잖는가. 지금 갈대들 모습이 그러하다. 바람이 한바탕 너른 호숫가를 훑고 지나가자 푸른 융단을 이룬 늪지대 갈대들이 일제히 몸을 눕혀 바람 앞에 마치 읍(揖)하듯 겸손한 자세다. 유연하게 몸을 굽힌다. 

이때 눈을 들어 녹음이 우거진 근처 야산을 바라봤다. 나무들은 자신의 영역에 이종(異種) 나무들이 뿌리를 내려도 결코 배척하지 않은 채 생장하고 있었다. 서로 어우러져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아파트 앞 호숫가의 물은 항상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몸을 낮추어 흐르기도 하잖은가. 물은 절대 거슬러 흐르지 않는다.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은 저마다 고운 색으로 피었다가 자신의 존재감을 뽐낸 후 소리 없이 아름다움을 상실할 줄 안다. 아무리 곱디고운 꽃이라도 자신의 생명이 다하면 화려했던 과거쯤은 과감히 떨칠 줄 안다. 이에 비하여 우리는 어떤가. 현재 영욕의 시간이 영원할 줄 알고 오만과 교만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하지만 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열매와 씨앗이라는 결실과 맞바꿀 줄 아는 희생과 헌신도 감수할 줄 안다.

아파트 정원에 날아와 아침마다 지저귀는 새들은 바람이 몹시 불어오는 날을 일부러 택하여 정원수 맨 꼭대기에 둥지를 틀곤 한다. 이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끄떡없는 안전한 안식처를 짓기 위한 나름대로의 지혜일 것이다. 한낱 미물인 새일지언정 안전한 둥지를 원할 뿐 우리처럼 초호화 주택이나 집으로 부(富)를 축적하는 일 따윈 없다. 흙은 어떤가. 쭉정이나 흠결이 있는 씨앗은 절대 품지 않는다. 오로지 알곡과 우량의 종자만 가려 싹을 틔운다. 진실과 정직함을 흙을 통하여 깨닫곤 한다.
 
지난 초봄 호숫가 주변 산등성이에 간 밤 강풍에 꺾여 넘어진 고목 나뭇가지에서 연둣빛 이파리가 움트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바라보자 땅 속에 가까스로 내린 뿌리로 수액을 빨아들이며 새 생명을 피워낸 고목이 참으로 경이롭게 느껴졌다.

요즘 코로나19로 삶이 힘들어서일까? 호숫가 옆에 반쯤 뿌리가 뽑혀 넘어진 고목에서조차 삶의 의지를 얻는다. 따사로운 태양, 봄날의 훈풍, 하늘이 내려주는 비야말로 우주 삼라만상의 도약과 우리의 삶을 보장하는 필수 기후 조건이 아니던가. 이처럼 자연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자뭇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자연은 만물을 생동하게 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뿐만 아니라 진리, 지혜를 일깨워주는 한 권의 책이나 진배없다. 

집 근처 논에 심어진 파란 모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요즘이다. 이때 논둑에서 울어 젖히는 개구리 울음 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자연의 오케스트라나 다름없다. 이 울음 소리는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 정겨움마저 안겨준다. 어디 이뿐이랴. 먼 산에서 종일 우는 뻐꾸기 소리, 아파트 정원에 날아와 새벽잠을 깨우며 지저귀는 청아한 새소리는 세상사 잡다한 번민마저 깨끗이 헹구어주는 청량제인 셈이다. 가을날 형형색색의 고운 빛깔의 단풍들은 어떤가. 꽃처럼 아름다운 단풍잎이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한적한 숲속을 홀로 걷노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모처럼 자기 응시의 사유에 잠기게 한다.

또한 백설이 분분한 겨울밤, 소리 없이 내려 쌓이는 흰 눈은 한껏 침잠의 시간을 갖게 한다. 번잡한 삶 속에서 모처럼 벗어나 홀로 고독한 순간을 맞이하는 일도 눈 내리는 밤에 누릴 수 있는 한유(閑遊)함 일 것이다. 이런 자연을 통하여 우린 삶의 지혜와 동력(動力)을 얻곤 한다. 이로보아 자연은 심오하고 웅숭깊은 한 권의 양서(良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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