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욕쟁이 부인의 남편 보고서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책 속 명문장] 욕쟁이 부인의 남편 보고서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08.01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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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밤 11시 45분, 조용한 집안. 
어김없이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에두아르의 ‘취침시간’을 알리는 휴대폰 알림 소리이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알람을 끈 후 하던 일에 계속 몰두한다. 처음엔 ‘어차피 잘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취침 알람을 왜 맞춰 놓는 거지?’ 생각했다. 그런데 에두아르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한밤중이 되어도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 그가 잊어버리는 것은 취침시간만이 아니다. ‘그 일’ 이외엔 대부분의 것들을 잊어버린다. 아니, 아예 신경을 꺼놓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하루는 퇴근시간이 다 되어가는 늦은 오후에 전화를 해선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댔다. 

“혹시 오늘 집 앞 전철역에서 구두끈 못 봤어?”

구두도 아니고 ‘구두끈’이라니. 구두끈이 없으면 걸을 때마다 뒤꿈치가 덜컥대서 불편했을 텐데, 하루 종일 그런 구두를 신고 다녔다는 건가? 그는 동료 선생이 “왜 구두끈을 안 매고 다니는 거야?” 물어봐서야 헐렁한 구두가 불편하게 느껴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정신을 오직 ‘그 일’에만 쏟아부으니 웬만한 신체적 불편은 못 느끼는 사람이다. (중략)

죽은 시계를 소생시키는 데 성공한 에두아르는 안정을 되찾고 다시 ‘그 일’에 몰입했다. 그가 쉬지 않고 해대는 ‘그 일’이란 책을 읽는 일이다. 모두가 바람직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독서’라는 것. 

마흔을 넘겨 한 결혼에서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은 무엇인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긴장감에서 해방되는 게 아니었던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있을 테니 나는 이제라도 피곤한 긴장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게으르고 안이한 속셈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소박한 바람 아닌가. 

현실은 냉혹해야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는 책 읽느라 다른 물건들은 챙길 겨를이 없는, 뭐든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것이 다반사인, 심지어 취침시간까지 잊어버리고 책을 읽어대는 나사 빠진 남자와 결혼하고 말았다. 행운으로 위장된 다행을 하루에도 열두 번 겪는 남자. 이 남자와 살려면 내가 그의 몫까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내 정신 차리기도 버거운 나한테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결혼은 없었던 일로 하기엔 매우 번거로운 제도다. 작가 이만교는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했던가? 나는 결혼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미친놈’과 결혼했을 뿐이다. <4~9쪽>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이주영 지음│나비클럽 펴냄│336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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