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아닌 ‘사랑’에 관한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우정’이 아닌 ‘사랑’에 관한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1.03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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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눈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 그야말로 스크린에 별빛이 내린다. 그래서일까. 다소 비극적인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극장 밖을 나서면 왠지 모를 행복감이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른다. 최민식은 아름답고 한석규는 황홀하다. 허진호 감독의 <천문 :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는 두 배우의 연기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멜로드라마이다.

그렇다. <천문>은 역사 영화(historical film)의 외피를 두른 멜로드라마인 것이다. 허진호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역사적 사실에 영감을 받았다”고 검은 스크린에 아로새긴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영감’에 방점이 찍힌 채 전개된다. 그 영감은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이 발명한 눈부신 과학 기기를 뛰어넘는 어떤 광휘(光輝)가 되어 관객의 마음을 환하게 비춘다.

그 광휘란 바로 사랑이다. 위대한 영웅들의 놀랄 만한 업적이 아닌 소박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닌 인간들의 ‘그저 그런 사랑’ 말이다. 그러니 <천문>과 비교할 수 있는 영화는 장엄한 스케일의 역사 영화나 전기 영화(biographical film, 역사 속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허진호의 눈물겨웠던 멜로드라마 <8월의 크리스마스>(1998)와 <봄날은 간다>(2001)가 될 것이다.

다만 <천문>이 허진호의 전작들과 다른 점은 이성애중심주의로는 도저히 산출할 수 없는 멜로드라마의 정동(情動)을 뿜어낸다는 데 있다. 모든 관계는 깊어지면 사랑을 동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우정’이나 ‘브로맨스’(bromance, 남성 간의 친밀하고 깊은 우정을 이르는 말)라는 단어로 제한한다면 이 영화를 납작하게 만드는 감상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천문>은 어떤 영화인가?

영화학자 알렉산더 도티는「Flaming Classics: Queering the Film Canon」란 글에서 “모든 영화는 항상 이미 퀴어적”이라고 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초점을 둔 효용론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말처럼 모든 영화는 다분히 퀴어적이다. 퀴어 영화의 효용은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의 태도(혹은 당사자성)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감상이라는 행위가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관객이 능동적으로 영화의 또 다른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라면, <천문>은 충분히 ‘퀴어 멜로드라마’로 재정의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종과 장영실은 <왕의 남자>(2005)의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 혹은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2016)의 재호(설경구)와 현수(임시완)의 관계처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대명사, ‘로미오와 줄리엣’의 또 다른 판본에 다름 아니다.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세종과 장영실이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는 모습을 부감 숏(높은 곳에서 내려찍기)으로 포착한 장면. 장영실이 먹물과 창호지, 호롱불만으로 세종에게 우주를 선물한 장면. 영화의 마지막, 그들이 주고받았던 절절한 눈물은 위 논의의 적절한 주석이 될 수 있다. 특히 장영실이 세종의 침전으로 들어가 간이 혼천의의 조작법을 알려주는 장면은 묘한 성적 긴장감마저 감돈다. 이게 사랑의 한 단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명시적으로 퀴어 영화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읽히는 영화들이 있다. ‘이해’되지 않고 그저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영화. 말하자면 <천문>은 후자에 가깝다. 그 이유는 영화에 내재된 ‘퀴어다움’(queerness)이라는 ‘무의식적 감각’에 기인한다. 그 주관의 감각을 객관적인 영화 언어로 논고하는 일은 매우 지난한 작업이다. 앞선 언급처럼 그것은 대개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영화를 퀴어적으로 독해하는 행위는 논리적 서술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구호에 가깝다. 하지만 퀴어 영화 비평의 본령이 이성애중심주의 영화에 은근하게 깔린 ‘퀴어다움’을 발굴하는 일이라면, <천문> 역시 퀴어 멜로드라마로 독해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적극적인 오독’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일으키고, 나아가 삶과 섹슈얼리티를 보다 다층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면, 분명 생산적이고도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비록 누군가에겐 이상한(queer) 일로 비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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