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은 소설집 등 책의 맨 뒤 또는 맨 앞에 실리는 ‘작가의 말’ 또는 ‘책머리에’를 정리해 싣는다. ‘작가의 말’이나 ‘책머리에’는 작가가 글을 쓰게 된 동기나 배경 또는 소회를 담고 있어 독자들에겐 작품을 이해하거나 작가 내면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에 독서신문은 ‘작가의 말’이나 ‘책머리에’를 본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발췌 또는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주>
[리더스뉴스/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 낸 정이현 작가의 말= 동시대인의 보폭으로 걷겠다는 마음만은 변한 적이 없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나와 빼닮은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쓸 수밖에 없다. 소설로 세계를 배웠으므로, 나의 도구는 오직 그뿐이다.
마감 기간에 일상은 자주 엉망이 되곤 했다.
책의 원고를 정리하는 사이 계절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내일은 뒷문이 우그러진 지 두 달째인 자동차를 정비공장에 데려갈 것이고, 옷장 구석구석 처박힌 반소매 옷들을 착착 개어 깊숙이 집어넣을 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낼 것이고,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에 담긴 여러 권의 책들을 결제할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이 앞에 놓여 있을지 가늠되지 않아도 숨을 한번 고르고 먼 길을 다시 간다.
#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작품 해설= (전략) 어느덧 옛날얘기가 됐지만 2030 여성들의 삶을 날렵하고 경쾌하게 대변한다거나, 소비 사회의 환상적 욕망을 냉소한다거나, 혹은 붕괴할 것 같은 세계의 틈을 고발한다는 평을 듣던 정이현의 소설이, 이제 이토록 메마른 풍경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 어떤 얘기를 걸어오려는 것일까.
두번째 단편집 『오늘의 거짓말』에도 파삭한 먼지바람 날릴 것 같은 세계에 대한 환멸은 옅지 않았다. 근 10년 만에 ‘상냥한 폭력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묶인 이 책에서 우리는 그사이 결혼하고 아이 낳는 시기를 거쳐 어느새 중년이 되어버린 그때 그 세대의 현재를 만나고 말면 될 뿐일까. 결과부터 말하면, 이 책을 펼치자 나는 내가 있는 풍경 속으로 들어왔는데, 아주 먼 세상을 헤맨 것보다 더 힘들고 더 아팠다.(후략)
# 정이현은 누구인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이 있다.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252면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