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미인 세례가 부정적인 뜻으로도 쓰인다. 대표적인 용례가 계란세례, 밀가루세례, 주먹세례다. 밀가루세례는 졸업식에서 볼 수 있었다. 검은 교복에 흰 밀가루를 뿌리면 명암이 분명하다.
졸업생들은 검은색 규칙에서 벗어나 흰색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로 이 같은 의식을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교복이 많이 사라지고, 학교에서의 권위주의도 발을 붙이기 어렵다. 이 문화는 기록영화처럼 기억돼가고 있다.
주먹세례는 사회 곳곳에서 여전하다. 사람이 만나다 보면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흥분하면 법보다 주먹이 가깝게 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구급대원 폭행이다. 인사불성의 취객이 구급대원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환자의 가족이 구급대원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급박한 상황이기에 냉정을 잃은 경우가 많다. 그렇다 해도 인명을 구하는 구급대원에게의 주먹세례는 씁쓸할 수밖에 없다.
계란세례는 심심찮게 터져 나온다. 주로 정치인이 단골이다.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도 계란세례를 받았다. 민감한 시기에는 주한 일본대사도 계란투척을 당한다. 이는 먹을거리인 계란에 항의의 상징성이 더해진 결과다. 정치적 불만을 계란을 던지는 것으로 표현하는 탓이다.
이를 유머스럽게 넘기는 경우도 있고, 흥분한 사례도 있다. 대통령 후보 시절에 계란세례를 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 한 번 잘 맞아줘야 국민의 성이 풀리지 않겠느냐"며 받아들였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도 선거유세 중 계란을 맞았으나 "계란 마사지 했더니 못난 얼굴도 예뻐 보이지요"라고 해학 있게 표현했다.
계란세례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1992년 10월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했다가 계란투척 선물을 받았다. 영화스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주지사 선거 유세 중에 계란세례를 받았다.
계란의 현대적 의미는 먹을거리이자 소극적인 항의다. 하지만 하루 양식을 걱정하던 몇 십 년 전만 해도 먹거리 투척을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쌀 한 톨도 물에 씻겨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조리질하던 어머니 할머니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추수 후 벼이삭을 줍던 시절을 산 중년 이전의 세대가 보면 단순히 계란을 던지는 게 아니다. 피와 살을 던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다.계란 입장에서는 많이 억울할 것이다. 달걀은 수천 년간 인간의 먹을거리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렇기에 달걀은 왜 항의와 저항의 상징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계란투척을 하지 않았을까.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시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차운양교감한식일격식(次韻梁校勘寒食日邀飮)'이라는 제목의 시다. '양교감이 한식에 한 잔 청하므로 그의 운을 차한다'는 뜻이다.
살구꽃 만발한 늦은 봄 다가왔으니
서울 거리에 투란할 시기로다
술에 취해 금화일인 줄도 알지 못하니
훈훈한 술기운 사람을 데워 주네
시에는 '정시장안투란신(正是長安鬪卵辰)' 구절이 있다. 장안은 옛 중국 왕조들의 수도다. 투란은 계란을 던지는 것이다. 중국 초나라의 문화를 적은 『형초세시기』는 한식을 전후하여 3일 동안 투란놀이를 한 풍속을 전하고 있다. 2천년 전에도 계란을 던지고 깨뜨리는 놀이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도 계란이 항의의 표시는 아니었다.
인간에게 충성을 다해온 계란과 닭의 입장에서 계란세례는 기분 좋을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계란을 먹을거리와 생명으로만 보는 게 좋겠다.
■ 글쓴이 백민제는?
맛 칼럼니스트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0년의 직장생활을 한 뒤 10여 년 동안 음식 맛을 연구했다. 특히 건강과 맛을 고려한 닭고기 미식 탐험을 했다. 앞으로 10여년은 닭 칼럼니스트로 살 생각이다. 그의 대표적 아이디어는 무항생제 닭을 참나무 숯으로 굽는 '수뿌레 닭갈비'다. www.supur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