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지同人誌를 통한 문학의 현대성 구축작업(5)
동인지同人誌를 통한 문학의 현대성 구축작업(5)
  • 조완호
  • 승인 2007.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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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창조≫≪폐허≫≪장미촌≫≪백조≫≪금성≫
▲ 조완호     © 독서신문
상화尙火 이상화는 언제나 순일純一 하나다. 그의 시는 전아典雅보다 장중莊重하다. 한때는 타는 듯 불덩이 같은 시대 정열이 이 순된 시인을 어찌 아니 엄습했으랴. ‘상화’란 호를 쓴 때의 그의 시를 보면 그 시대 이 시인의 의식을 잘 알 수 있다. 요사이 그의 시는 다시 상징의 장중으로 돌아가는 듯 농후한 시의 존엄을 느낀다.
팔봉 김기진은 ≪백조≫ 후기의 동인이다. 진전되려는, 새로이 대두하는 사조를 함뿍 흡수하고 진재(震災 :관동대지진)를 거쳐 나온 그는, 동인 중의 사조의 최첨단을 걷는 선구자였다. 그는 6척 장신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루바쉬카(러시아 옷)’를 입고 카페 의자에 걸터앉아서 <아아 내 손이 왜 이리 희냐>를 탄식하였다. 이 시가 나오기 조금 이전에 <이상주의자의 사死>·<붉은 쥐> 등 신新경향파를 낳을 전제의 작품을 썼다.”
≪백조≫는 통권 3호를 내는 동안 문학사에서 평가받는 적지 않은 작품을 냈다. 
시에서는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제3호)>,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제2호)>,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제3호)>, 박종화의 <흑방비곡(黑房悲曲(제2호)>·<사死의 예찬(제3호)> 등이고, 소설에서는 나도향의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여 이발사(제3호)>·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제3호)>, 박종화의 <목매는 여자(제3호)> 등을 들 수 있다.
박영희는 ‘백조문학’을 회상하여 <백조 화려한 시대>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1933.9)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한 바 있다.
 
1920년대는 우리문단에 온 시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잘 되었건 못 되었건, 문인이면 시인이 될 만큼 시의 세기世紀였다. 홍사용 군은 신인 중에서도 서정시인이었다. 애상哀傷의 시인이었다. 이러한 리리시즘 가운데서도 이즘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월탄 군도 그러한 경향이 물론 많았으나, 다소 휴머니즘의 미립微粒이 군데군데 섞였다고 해도 무관하다.
…중략…
와일드의 화사華奢, 베르렌의 퇴폐, 포우의 기괴奇怪, 보들레르의 방종放縱 등의 기질의 별형別型을 ≪백조≫시대가 그 특색으로서 소유하였었다.
≪폐허≫ 시대가 통권2호, ≪백조≫는 3호밖에 나오지 못한 잡지이면서도 그로 해서 ‘폐허시대’니 또한 ‘백조시대’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우리 문학사에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문학을 통해 자기 정체성은 물론 시대성까지도 구현하려는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은 문학을 표피적 정서나 사상의 배출 수단 정도로 여기기보다는 민족이나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제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6. 와세다早稻田대학 유학생들의 시 전문 동인지 ≪금성金星≫
  ≪금성≫은 1923년 11월 10일자로 창간된 시 전문 동인지로서, 1924년 1월까지 통권3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편집인은 유춘섭柳春燮, 발행인은 일본인 류비자와柳美澤梅子였다. 인쇄소 는 대동大東인쇄주식회사였고, 발행소는 서울 인사동 30번지의 금성사였으며, 국판 50면으로 정가는 30전이었다.
≪금성≫이란 제호는 여명黎明을 상징하는 ‘샛별’과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 두 가지를 함께 뜻하는 것이다.
창간호의 동인은 손진태·양주동·백기만·유춘섭 등이었고, 이상백과 이장희는 3호 때 동참했다. 이들은 모두 와세다대학 유학생들인데, 이장희만 교또京都중학을 졸업했다. 1호·2호는 유춘섭이 발간했고, 3호는 양주동이 발간했으며, 3호의 발행인은 야마구찌山口誠子였다.
창간호를 냈던 유춘섭 즉 유엽은 1960년 ≪사상계≫1월호에 창간 비화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잡지 ≪금성≫을 발간하던 해가 내 나이 약관을 겨우 벗었고, 내 선인先人의 환갑 해이던 계해癸亥(1923)년이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고향 전주에 돌아와 여름을 마음껏 잘 놀고 내일이면 다시 일본으로 갈 판이었다. 떠날 준비를 하느라고 가방을 정리하고 앉았노라니까, 전례 없이 아버지께서 일찍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나를 불러 세우시고, “이애 일본은 망했다. 부사산富士山이 터졌다는구나.”
 
…중략… 
나도 밖으로 나와서 수소문해 본 결과 동경에 진재震災가 일어나서 불바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 일이 궁금하여 그 이튿날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 보니 동경을 가려고 떠났던 학생들이 더러는 부산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패들도 있고, 더러는 나처럼 궁금해서 서울로 온 패들도 있어 서울은 동경유학생들의 임시 집합장소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때 인사동에 호혜여관이라는 우리 집 지정여관이 있어 그곳에 투숙하고 있었다. 얼마를 먹는지 밥값은 걱정이 안 되는 판이요, 주머니 속에는 기름기가 돌고 있으니, 매일 몇몇 학우들끼리 만나 호언장담에 꽃을 피우다가 날을 보내고 말았다.
그때 상종하던 패로는 와세다에 학적을 같이하고 있던, 그중에도 문과에 같이 있는 손진태·양주종·백기만 군들과 그리고 나해서, 넷이서 매일 서로 만나 혼천동지混天動地하는 행동과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언설로 소일하고 있었다. 손군 양군 둘은 그때도 술이 보통이 넘었고, 백군은 대작對酌 정도요, 나는 풋술이었다. 이렇게 날을 보내면서… 시가詩歌를 중심으로 한 문예잡지를 하나 해보자는 의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금성≫잡지가 나오게 된 동기였다.
양주동은 그의 『문주반생기』에서 ≪금성≫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금성≫ 발간의 일로 나는 일부러 귀국하여 그 첫 호를 내기에 골몰하였고, 예과 3년 졸업한 뒤에도, 마침 동경 대진재 관계도 있었지만, 나는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이 ‘시문학 운동’에 열중하였다. 딴은 나뿐인가, 엽葉군은 문학을 한다, 연애·실연을 한다, 하는 통에 예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한때 해인사海印寺·유점사楡岾寺 어디 어디로 입산수도, 뒤에 가사·장삼에 송낙(승려가 쓰는 모자)·바랑으로 서울의 거리를 헤매었으며, 웅(熊·백기만의 호 白熊)군은 가정사정인지 그의 야성적인 방랑벽의 소치였는지 예과 2년 때 진작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래도 나만의 2년간을 ‘신문학운동’에 바치고 나서 1925년 다시 도동渡東하여…  불문과로부터 다시 영문과로 전학하여 학업을 꾸준히 계속하게 되었으니, 유·백 두 군보다도 덜 천재 벽癖을 가진 속된 나의 다행한 결과라 할까. 
우리들의 당시 시풍詩風이 자칭 상징주의요 퇴폐주의임은 누술樓述한 바와 같다. 그러나 세 사람, 뒤에 고월 이장희까지 네 사람의 시풍은 결코 정말 세기말적 데카당적은 아니었고, 차라리 모두 이상주의적·낭만적·감상적인 작품이었다.
창간호가 나오자, 당시 우리 것보다 1년 전에 간행된 ≪백조≫와 함께 갑자기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인기도 좋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때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고, 모두 자가도취로 자칭 천재, 주사酒肆(‘주사’라야 선술집이지만)·대로大路를 자못 내로란 듯이 횡행활보하였다. 나는 예의 루바시카 보헤미안 넥타이로.
이윽고 창간호 소재所載 제작에 대하여 안서 김억의 시평詩評이 ≪개벽≫지엔가 실렸는데, …나와 안서 간에 격렬한 논전이 벌어졌다. 한편 번역인 <보들레르 시 초抄>를 보고 산강 변영로 선생이 그 역자인 나를 그리워하여, 여러 번 나의 숙소로 위방委房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빙허·상화와 알게 된 것도 아마 그때일 것이다. 동인 제군은 유군의 숙소이던 영등포까지 밤마다 한강을 건너 달려가서, 제2호에 실린 <금성 노래>― ‘morning star, word and music by c. rhew'라 부제副題한 유군 작사 작곡의 명곡을 광야에서 밤 깊도록 합창하다가, 들어가 다시 통음痛飮하면서 문학적 종횡縱橫 담론談論에 날이 새는 줄도 모르던 것을 지금도 역력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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