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시조시인을 찾아
이병기 시조시인을 찾아
  • 이병헌
  • 승인 2006.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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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시인 · 소설가 , 임성중 교사)



가을빛 톡톡거리는 날 익산 몇 문인들과 함께 이병기 생가로 향했고 먼저 이병기의 시 ‘별’시비와 동상을 만나기 위해서 여산남 초등학교로 향했다. 초행길이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여러번 물어 보아서 초등학교에 도착했는데 건물의 앞에서 발견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동상과 시비가 뒷 건물 앞에서 발견했다. 우리들은 시를 읽어보다가 누군가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모두 노래를 부르며 이병시 시조시인의 별을 음미했다.   
 

바람이 소슬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역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통하는 면이 있는지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노래가 초등학교 교정을 메웠다.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을 벗어나 우리들은 다시 물어 물어서 이병기 생가로 향했다. 도로 옆의 마을길로 들어가는데 아쉬운 것은 이정표 하나 서 있지 않다는 것 이었다. 마을길을 따라서 잠시 달린 버스는 주차장에서 우리들을 풀어놓았다.
 
  우리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고풍을 머금은 초가집이었다. 그 곳은 소박한 선비의 가옥으로 시조시인이요, 국문학자인 가람의 생가가 보존되었다. 몇 년 전 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방에는 냉장고나 옷가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족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이 가옥은 일생을 학문으로 살다 간 선비의 체취를 간직하고 있다. 건물은 조선조 말의 고패형식으로 된 안채와 일자형의 사랑채, 그리고 고망채와 연못가에 모정까지 있어 운치를 간직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풍구, 맷돌, 뒤주, 장독의 항아리등 아직도 삶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심훈의 필경사에서 보았던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정겹게 느껴졌다. 
 
  근세 시조문학의 대가인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은 1891년 3월 5일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의 용화산 기슭 진사동에서 연안이씨 채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 한자를 배우고 한문을 읽기 시작했고 열여섯에 혼인했다. 이때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는 등 나라의 운명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그는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했고 1910년 4월에는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한 가람은 낮에는 학교공부를 하고 밤에는 조선어 강습원에 나가 주시경의 조선어 문법 강의를 들으며 이때부터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뜻을 굳혔다.
 
  1913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후  남양 보통학교, 전주 제2보통학교, 여산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전주에 호영강습원을 열어 저녁이나 방학 때면 여기에 나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과 역사를 일깨워주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가람은 보통학교 훈도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와 1921년 권덕규 임경재 최두선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여 그 간사를 맡으면서 이듬해에는 동광 휘문 등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 서울 계동에 집도 마련하고 난초등 화초를 벗삼아 특히 우리 고전문학에 집착하였고 그는 신시 소설 등의 신문예운동도 있어야 하려니와 시조에 대한 신운동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시조를 창작하여 그 문학적 가치와 지위를 높이는데 앞장섰으며 영도사에서 시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가람은 또한 1920∼30년대에 우리의 고전을 발굴 수집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한편 가람은「한국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의 사정위원으로서도 활약했다. 그는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왜경에 피검되어  1년 동안 옥고를 치른후  여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광복을 맞은 후 미 군정청 학무국 편수관으로 중학교 국어 교과서 편찬을 맡았고 46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개론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 다음해 편수국을 사직한 그는 강의에 몰두했으나 6.25가 터지자 다시 고향에 피난해 왔다가 51년 전세가 호전되고 전주에서 명륜대학이 개강하게 되자 이 대학에 초빙을 받게 되어 56년 전북대학교 문리과 대학을 정년으로 퇴임하기까지 우거하였다. 그는 한말에 쇠퇴해 가는 우리의 고유문학인 시조의 부흥운동에 앞장서 시조문학의 맥을 잇게 한 거목이다. 선생은 생가에서 말년에 병으로 10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의 묘는 생가 앞에 위치해 있는데 봉분이 따로 없이 묘비만 서 있고 그 밑에 잠들어 있었다. 묘 옆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상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시비가 하나 있었다. 
 
고향(故鄕)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 살리 없으련 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묶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돌아오는 길에 시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느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독서라는 것이 꼭 산문만을 의미하지 않으니 시나 시조를 읽고 시심에 빠져보는 것이 바로 독서삼매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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