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시민 김관식: 김관식, 「병상록」
[시민 시인의 얼굴] 시민 김관식: 김관식, 「병상록」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3.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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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십 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간(肝), 심(心), 비(脾), 폐(肺), 신(腎)……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 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 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憂患)에서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김관식, 「병상록」

시민 김관식

김종삼 시 「시인학교」에는 시인 다섯 명만 눈에 띕니다. 선생인 모리스 라벨, 폴 세잔느, 에즈라 파운드는 결강입니다. 김소월과 김수영은 ‘휴학계(休學屆)’를 냈습니다. 텅 빈 교실에는 요절한 전봉래와 김종삼이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5번을 틀고 소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 누군가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 지르며 지참한 막걸리를 먹고 있습니다. 시인의 시인이라 불리는 김종삼이 진정 시인으로 여겼던 시인 김관식입니다. 누군가는 술주정뱅이에 안하무인 시정잡배라 말하길 서슴지 않습니다. 천상병처럼 기인이라 치부해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 시의 병폐 중 하나인 ‘교양주의’ 시선은 아닐까요. 뭔가 젠체하는 시인들에게는 눈엣가시였으니까요.

시 「병상록」은 1970년 그가 세상을 등질 무렵 쓴 시입니다. 서른여섯 짧은 생애 중 태반을 가난과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누군가는 술을 너무 먹은 자기 잘못이며 격에 맞지 않게 ‘민의원’ 선거에 나섰기 때문에 패가망신한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제목만 보면 후회와 반성으로 점철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김관식은 그런 시인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사람은 우환(憂患)에서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 것’이라고 주눅 들지 말라 유언 아닌 유언을 하지 않습니까. 일신의 안위만 좇는 최후의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경지입니다. 이 시구를 보니 살아서는 결코 자신을 위해 노래하지 않겠다던 오장환이 떠오릅니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무덤가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예언했던 오장환의 시 「나의 노래」가.

김관식은 홍은동 산동네에 살았습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지게꾼을 불러 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산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개미굴 같은 판잣집에 기어들며 삶의 우환과 안락을 이야기합니다. 오슨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에서 주인공이 난폭하게 물건을 때려 부수다가 눈 내리는 집 유리공 장식물에 손을 대고 ‘로즈버드’라고 단말마처럼 중얼거렸던 장면은 아닐까요. 누가 들으라는 외침이 아닙니다. 숨죽여 사는 타자들은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곤 합니다. 대문짝만하게 ‘대한민국 김관식’이라 새겼던 명함은 빛바랬습니다. 「시인학교」에 다정하게 쌓인 두꺼운 먼지 위에 ‘시민 김관식’이라 써 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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