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같은 여인
물 같은 여인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0.05.0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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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는 말에 공감한다. 매사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은 성취욕도 강하다. 뿐만 아니라 남다른 지혜와 정확하고 신속한 업무 처리 능력으로 일찍 성공의 가도에 오르기도 한다. 어떤 분야든 성공한 사람들에겐 이러한 공통적인 성향이 있는 듯하다.

필자 역시 젊은 날엔 열정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이에 더해 이타심이 남달라 걸핏하면 타인 일에 소매를 걷곤 했다. 이때마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쯤은 외면하기 예사였다. 돌이켜보면 이런 심성이 결코 바람직한 것만은 아닌 성싶다. 한편으론 덕을 쌓고 선행을 행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정의가 실종된 경우엔 때론 헛된 오지랖으로 작용하기도 해서이다.

이는 남이 베푼 호의나 친절을 눈앞의 잇속에 악용하거나, 아님 옹색한 잣대로 함부로 재어서 타인을 불신하는 세태 탓이라면 지나칠까. 평소 타인의 어려움을 마치 내 일처럼 맞섰다가 외려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 ‘좋은 일 하고 뺨 맞는다’라는 격이었다고나 할까. 

십수 년 전 어느 여인이 자신의 어려움을 간곡히 부탁해왔다. 그때 마치 내 일처럼 힘껏 그녀의 어려움을 도왔다. 그녀가 머잖아 그 일로 인해 드디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자, 배은망덕하게도 나를 토사구팽 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음해, 중상모략까지 하는 비인간적인 행태를 저질렀다.

이렇듯 그녀로부터 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했으나 이즈막에도 누군가 내게 어려움을 호소해 오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남의 일에 발 벗고 나서기도 한다. 각박한 세상에 내 몸 사리지 않고 남의 일에 관심과 친절을 베푼다며 친구는 이런 내게 ‘물’이란 별명을 지어줬다. 물이란 별명은 썩 마음에 와닿진 않는다. 개인적 생각일진 모르나 ‘물’ 하면 떠오르는 게 우유부단하고 왠지 무녀리 같은 인상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활동성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별명이 그다지 귀에 거슬리진 않는다. 계곡의 바윗돌을 때리며 흐르는 맑은 물줄기는, 무더운 여름 용광로 속 같은 염천엔 상상만 해도 한껏 청량감을 안겨준다. 바닷물 역시 쉼 없이 움직이지 않는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비롯해 밀물과 썰물이 그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물은 지열, 태양열에 의해 수증기가 돼 공중으로 올라가곤 한다. 그리곤 물은 구름이 돼 대기의 넓은 공간을 유유자적 헤엄치다가 제 몸무게를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을 땐 비, 혹은 눈이 돼 대지 위로 내려온다. 

어디선가 읽은 물의 영구 순환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당나라 때 양귀비가 목욕한 물이 아직도 세계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게 그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물로 혹시 내가 밥을 지었을 수도 있고, 샤워를 했을 수도 있으며, 남편의 술잔에 담기기도 했을 것이다. 이는 물의 순환은 본질적으로 영원불멸이라는 의미일 게다. 

다 알다시피 인체의 약 70%가 물로 이뤄져 있다. 또한 물의 특성은 무색, 무취, 무미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물은 필수적이다. 물은 사람의 수명은 물론이려니와 성격 형성까지 좌우하기도 한단다. 오늘날 인간 수명이 백 세를 바라보는 것도 실은 수돗물 공급이 그 원인이라는 어느 학자의 주장도 있을 정도다. 영국의 경우를 예로 살펴보면 더 적확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여 년 전 1841년 영국 리버풀 맨체스터 시민의 평균 수명은 불과 스물여섯 살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수돗물이 보급되지 않아 개울물을 식수로 사용하던 시대였다. 이때 시민들은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가 번져 심한 공포에 떨었다고 하니, 물이야말로 인류의 생명을 책임지는 생명수이다. 사람 체중의 3분의 2 정도는 물론이려니와, 근육 75%가 물이며, 뼛속 22%가 물이라고 한다. 우리 몸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리 크니 평생 마시는 물이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법도 하다. 물이 사람의 성격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온 우리 조상들은 물조차 세심히 골라 마시는 지혜를 지녔다. 연수(軟水), 경수(硬水), 감수(甘水), 고수(苦水) 등으로 물의 청정도와 맛에 따라 수질에 대한 등급을 매기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우리 조상님들이 삶 속에서 물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짐작할만하다.

그러고 보니 ‘물’이란 나의 별명에 갑자기 애정을 느낀다.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남성 호르몬이 증가해 여성성을 잃는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 ‘물’이란 별명이 주어진 한 일상에서 유연함, 부드러움을 지닌 여인으로 거듭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별명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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