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속물들
거룩한 속물들
  • 황정은
  • 승인 2010.03.09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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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황정은 기자 = 살아보려 하지만 나를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세상. 그런 세상에 편입돼 살려는 시도는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대개, 세상에 대한 소외와 소통의 단절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절대 고독에 빠져 헛헛한 마음을 합리화 하고 회피하는 것, 또 하나는 그러한 세상에 철저하게 편입되는 것이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 고독한 현대인이라고 지칭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 ‘속물’이라고 명명한다. 고독한 현대인과 속물인 현대인. 과연 그 차이는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얼마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사실 현대인들의 속물근성은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의 경우 사람이 절망적 상황에 빠졌을 때 그 변화 순서가 ‘부인-분노-체념-인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갈수록 살기 빡빡한 인생을 부인하고 분노하는 단계가 바로 속물에 처한 단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거룩한 속물들』의 작가 오현종은 현대시대에서 속물로 살 것을 권유받는 20대의 모습을 솔직하고 얄밉게, 그럼에도 재치있게 담아내고 있다.

한 여대의 사회복지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기린’과 그녀의 친구 ‘명’, ‘지은’은 생활보호 대상인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는 전공실습 수업 때문이며 실제로 이 여대생들은 가난이라면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전형적인 현대판 젊은 속물들이다.

이들 인물들 모두 빈곤한 삶을 싫어하지만 각자 처한 상황을 다 제각각이다. 돈이 너무 없어 비루한 삶을 사는 기린과 너무 돈이 많아 가난한 사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명, 그리고 환경과 상관없이 ‘그냥 속물’인 지은.

아직 20대의 ‘꺾임현상’도 경험하지 않은 기린이지만 tv나 주위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있어서인지 세상을 사는 철학만은 매우 확고하다. 그것은 바로 ‘가장 끔찍한 것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순진하게 살다가 뒤통수 맞는 인생’이라는 것. 때문에 그녀의 생활 신조까지 ‘보다 철저한 속물이 되어야겠다’고 일축돼버렸다.

기린의 ‘속물 연대기’는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을 통해 여실히 반영된다. 기린이 처음 만난 남학생은 의대생이자 지방 소읍의 보건지소에서 공중보건의로 병역 복무 중인 동운이다. 그는 기린의 ‘늙고 주름진 아파트’를 보고서도 개의치 않고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뜻하지 않은 오해로 둘은 다투고 헤어지게 된다.

이후 기린에게 찾아온 두 번째 남자는 바로 경제학과 학생이자 주식동아리 회장. 그의 학과와 동아리 이름이 그의 성향을 말해주듯, 그녀가 새로 만난 이 ‘경제학과’는 돈만 밝히고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사는 남자다. 기린 그녀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속물인데, 경제학과 앞에서는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그는 고단수다.

그녀의 가족들은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고통으로 날마다 신음하며 아파트와 차의 크기로 인생과 사람을 재단하며 자신들 또한 여과없이 재단당하고 만다.

이들 주인공들은 자의든 타의든 속물이 되기를 권유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수용한다. 세계와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권유’와 ‘수용’.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이유는 ‘거룩한 속물’이 되는 것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라는 암묵된 동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일상에서 계산된 생활을 끊임없이 발생시킨다. 연애에서, 혹은 가족관계에서, 혹은 학교에서 남들과는 ‘다른’ 고고한 속물근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은 매번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컨트롤하는 것.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려워요. 그건 마치 왜 사느냐, 이런 질문에 대답할 때의 기분 같기 때문이에요. 어떨 때는 속물이 되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밀려나는 느낌이죠. 누구는 갑자기 아파트 값이 올라 돈을 벌었다 하고, 큰 것에서 사소한 것까지 미묘하게 속물 권하는 세상에서 사는 절박한 기분이랄까요. 그런 문제를 갖고 소설을 썼지요.”

가난한 학생들에게 더 힘든 세상. 고등학교 교복을 훌훌 벗어 던지고 막 대학이라는 곳을 향한 큰 꿈을 갖기도 전에 등록금 빚으로 발목을 붙들려야 하는 이 시대의 20대들. 이 작품이 시선을 끄는 것은 속물에 대한 작가의 애절하고 긍휼한 응시 때문이다.

“돈을 많이 쓰는 속물들의 생활이 나쁘다는 식의 문제보다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정말로 하고 싶은걸 못하고 사는 것에 대해 썼습니다.”

‘속물은 나쁘다’는 일차원적인 공식에서 벗어나 작가 오현종은 이들의 내면과 상황을 파고들어간다. 과연 이들이 겪고 있는 아픔은 어떤 것인지, 이들이 토닥토닥 위로 받고 싶은 점은 무엇인지.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본 작가가 작품을 통해 언급하는 것은 바로 ‘꿈’이다.

속물들은 꿈을 강탈당했다. 자신들이 달려가야 할 목적지와 이유를 상실한 이들은 좋은 아파트와 많은 돈을 갖는 것을 자신들이 잃어버린 꿈의 자리에 대체시켰다. 주인공 기린 역시 방송국 스크립터로 취직한 후 뒤늦게 자신의 꿈을 밝힌 다음에야 인생의 참 맛을 음미하지 않는가.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었어요.”라는 그녀의 고백은 사실 오랫동안 가슴 속에서만 품어온 말이었다.

꿈을 빼앗기고 속물을 손에 쥐게 된 이 시대 젊은이들, 속물이지만 늘 거룩한 이상을 향한 불씨를 마음에 담고 사는 이들은 그야말로 ‘거룩한 속물들’이 아닐까.
 
 
■ 거룩한 속물들
오현종 지음 | 뿔(웅진문학에디션) 펴냄 | 260쪽 | 10,000원
 
chloe@reader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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