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어느 응급실 레지던트의 삐딱한 생존 설명서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책 속 명문장] 어느 응급실 레지던트의 삐딱한 생존 설명서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04.0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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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인간의 손은 놀라운 기관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움직일 뿐 아니라 다양한 동작이 가능하다. 다른 동물도 특별하게 진화한 코, 부리, 입, 혓바닥, 발, 꼬리 같은 기관을 사용해서 신기한 재주를 보일 수 있으나 몇 가지 목적에 특화돼 있을 뿐이다. 인간의 손처럼 다양한 목적에 따른 수많은 동작을 해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인간의 손도 평소 하지 않던 동작을 무리하게 반복하면 곧 문제가 생긴다. 통증이 나타나고 뻣뻣해지며 나중에는 저리고 감각이 둔해진다. 그때 나의 손이 그랬다. 왼손으로 10cc 주사기를 단단히 잡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로 주사기의 손잡이를 잡아당긴 다음 다시 엄지로 천천히 미는 동작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반복하다 보니 손바닥은 저리고 뻐근했으며 엄지, 검지, 중지는 얼얼하고 감각이 둔해져 국소 마취 주사를 맞은 것만 같았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중략) 

환자 주변 풍경은 섬뜩했다. 응급실에 마련된 중환자실 구역에는 건장한 체격의 환자가 누워있었다. 의식 없이 누워 있던 환자의 입에는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기관내관이 꽂혀 있고 기관내관의 끝에는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규칙적인 기계음과 함께 환자의 가슴이 들썩였다. (중략) 나는 그 옆에서 파란색 인턴 근무복을 입고 어두운 표정으로 10cc 주사기를 이용해 피를 짜 넣었다. 짜 넣은 피는 그대로 환자 안면부 상처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혈액이 든 비닐 팩을 교체할 때를 제외하면 나는 8시간 넘게 그 끔직한 동작을 반복했다. 그 외에는 당시 응급실 인턴이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환자는 다음 아침 사망했다. 응급실 인턴으로 겪은 최악의 하루였고 10년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불합리한 상황과 전개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 다른 임상과는 몰라도 응급의학과만큼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이었으나 우습게도 나는 응급의학과 레지던트에 지원했다. ‘부조리를 바로잡고 열정을 다해 일하겠다’는 정의롭고 다소 과대망상적인 목표 따위는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신과에 지원하고 싶었는데 당시 정신과는 최고의 인기과여서 나의 의과대학 성적으로는 지원할 수 없었다. ‘끄트머리에서 3등’으로 졸업한 의과대학 성적으로 지원 가능한 임상과는 응급의학과밖에 없었다. 그때도 다른 대학병원 응급의학과는 제법 인기가 있었으나 이미 말했듯 그 병원의 응급의학과는 단순히 정상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최악’에 해당해서 멀쩡한 정신을 지닌 사람은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08년 3월 나는 응급의학과 1년 차 레지던트가 됐다. <4~17쪽>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곽경훈 지음│원더박스 펴냄│328쪽│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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