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 거시사가 아닌 미시사로 조명한 ‘그때 그 순간’
‘남산의 부장들’, 거시사가 아닌 미시사로 조명한 ‘그때 그 순간’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2.07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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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호 감독,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제가 각하의 옆을 지키겠습니다.” 아마 <남산의 부장들>에서 가장 분열적인 대사가 아닐까. 결국 김규평(이병헌)은 각하를 죽임으로써 각하를 지켰다. 어쩌면 그 이상의 것들을 지켜 냈는지도 모른다. ‘백성을 가난에서 구원하시다가 믿었던 심복의 흉탄에 횡사한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지금까지 한국 보수 세력의 든든한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 물론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해석이다.

우민호 감독은 ‘정치색 배제’ ‘차갑고 냉정한 시선’ ‘인간의 고뇌’라는 말을 사용해가며 <남산의 부장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곡해되지 않길 바랐지만, 영화는 무엇보다 정치적이며 뜨겁다. 그리고 ‘인간의 고뇌’는 이병헌이 연기한 김규평, 그러니까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에게만 부여된 ‘특별한 입체감’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지향을 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전두환의 지저분한 탐욕과 김재규의 정의감 넘치는 최후 진술을 엔딩 시퀀스에 나란히 배치했다는 점 역시 의도적이다.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방식도 위 논의와 맞닿아있다. 김충식 작가의 논픽션 『남산의 부장들』이 박정희 정권을 비호하기 위해 온갖 모략을 펼친 18년 중앙정보부의 흉악한 민낯을 담고 있다면, 영화는 그 방대한 서사 중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기 직전의 40여 일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말하자면 유신시대 박정희의 폭정이 가장 극심한 때인 것. 이러한 선택은 당연하게도 카메라가 비운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넓게 보면 김형욱까지)의 발자취(혹은 딜레마)에 포커스를 맞추는 데 명분을 준다.

우민호 감독,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그렇다면 우 감독의 바람대로 정치색을 걷어내고 <남산의 부장들>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확실히 영화는 감독의 전작인 <내부자들>(2015)처럼 외설적인 자극도 없고, <마약왕>(2018)처럼 인물과 이야기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필름 누아르(film noir) 특유의 로키 조명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두 인물을 가까이서 포착하다가 갑자기 롱 쇼트로 전환해 관객과 거리감을 두는 방식, 이병헌과 이성민의 대작(對酌) 장면에서 180도 법칙을 깨트리는 화법은 그 나름대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는 기존 정치와 첩보 공작을 소재로 한 필름 누아르에서 숱하게 반복된 관습으로써 위의 언급만으로 <남산의 부장들>을 참신하고 독창적인 장르영화로 추켜세워 칭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령 똑같은 소재를 다룬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5)이 보여준 영화적 감흥(살육 현장을 누비는 한석규를 롱 테이크의 부감숏으로 포착한 장면 등)에 비하면 <남산의 부장들>의 그것은 다소 밋밋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제법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큰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10‧26사건’을 어쨌거나 거시사가 아닌 미시사로 바라보려 했다는 점. 그러한 시도가 ‘인물의 도덕적 모호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적 특성과 마침맞게 조응한다는 것. 이에 더해 영화 전반에 드리워진 음울하고 비관적인 ‘검은 정서’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에 힘입어 관객들에게 유효하게 전달됐다는 측면에 있다.

우민호 감독,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얘기가 나왔으니 배우들의 연기를 짚어보자. 늘 그렇듯 이병헌의 연기는 거침이 없고 미끈하며 아름답다. 이번에도 자신의 강점을 제대로 살려 극을 안정적으로 조율해나간다. 이성민도 기대에 확실히 부응한다. 특히 박정희의 실제 말투와 걸음걸이 등을 연구한 흔적이 보이는데, 첫 등장 장면은 실로 놀랍다. 각각 차지철과 김형욱을 연기한 이희준과 곽도원 역시 제 역할을 보란듯이 해낸다. 김소진은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신스틸러로 활약한다.

여담으로 얘기해보고 싶은 것은 영화가 과거 이병헌이 주연으로 열연한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2005)을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박정희(이성민)-김재규(이병헌)-차지철(이희준)’의 관계를 ‘강사장(김영철)-선우(이병헌)-희수(신민아)’의 관계로 치환해 놓고 생각해보면 <남산의 부장들>은 필름 누아르의 외피를 두른, 세 남자의 사랑과 배신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멜로드라마로 독해할 수 있다. 우 감독이 강조한 ‘인간의 고뇌’에 집중한다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아, 그렇다면 여기서 ‘모욕감’은 누가, 누구에게 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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