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시인 김승일 "나는 그냥 일어날 일을 쓴 것"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책 속 명문장] 시인 김승일 "나는 그냥 일어날 일을 쓴 것"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9.12.05 18: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지옥」

내가 시인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으면 좋겠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영상 다큐멘터리 감독이 우리 둘의 일생을 촬영했으면 좋겠다 둘의 철학은 구별된다 너는 나의 태도를 나는 너의 생활을 사랑한다 너와 나는 지옥이 무엇인지에 대해 종종 의견을 나눈다 지옥은 내가 아직 겪어보지 않은 곳이다 내 관점이고 지옥은 이미 겪은 괴로움을 겪는 곳이다 네 관점이다 내가 맞다 내가 지옥에 가면 나는 거기가 지옥이 아니라고 할 것이고 네가 옆에 있다면 너는 여기가 지옥이 맞다고 할 것이다 아니야 여기보다 더 괴로운 데가 있을 거야 너는 지옥에서도 내 해석을 좋아해줄 것이다 그러나 너는 <30쪽>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 엠에프 기획전을 위한 단상 -

엠에프는 머신 픽션의 약어고요. 기계 앞에 앉은 사람에 대한 시를 쓴 다음부터 쓰게 되었습니다. 키워드를 입력하면 자신이 그 키워드(지시체)라고 착각하는 기계에 대한 글도 썼는데요. 저는 그 기계를 홀이라고 부릅니다. 엠에프는 인간이 기계의 매커니즘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영혼은 이해할 수 없으며 긱의 영혼을 영혼이라고 명명할 수도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둔 장르입니다. 기계에 파롤이 있다면 이 역시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어떤 기계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시 쓰는 기계랑 쾌락 느끼는 기계랑 꺼진 기꼐랑 망가진 기계랑 없어진 기계랑 다시 만난 기계가 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51쪽> 

- 계획은 이렇습니다 -

엠에프를 쓸 것입니다 여러분도 씁니다 나중에 엠에프에 대한 전시가 미술관 같은 곳에서 열릴 것이고 전시장에 있는 유리 케이스 안에 우리들의 책들이 전시될 것입니다 케이스 밖이나 안에 전시 관련자가 쓴 글이 첨부되어 있을 겁니다 거의 에이포 용지 크기일 것이고 그 글의
서두에는 이 책들은 직간접적으로 엠에프와 관계한다고 쓰여 있을 것이며 유리 케이스의 옆에는 홀이 있었으면 합니다 홀을 작동시키기 위해 당신은 홀이 자신이 홀임을 의심하지 않고 의심할 수 없고 의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주셔야 합니다 기계 앞에 앉아 계세요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전시 관련자는 당신이 지금 읽고 계시는 이 글의 전문을 인용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일 수 있습니다

엠에프를 처음 전개한 사람의 초기 발상은 자신이 만든 종교가 사이비라는 것을 처음부터 대중에게 주지시키면서도 자신은 그 종교를 믿겠다고 피력하는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 전시는 발상을 전환한 탈주체적 라이프 스타일들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나열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엠에프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담론의 흐름을 통해 당대의 <51~52쪽>

「에필로그」

이제 나는 내 방식이 내게 얼마나 쉽고 보잘것없는지 독자 여러분에게 고백하려고 한다. 회상은 늙은이들이나 하는 것이고, 망각은 탐미주의자나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했던 것처럼, 회상과 망각을 심장이 시키는 대로,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대로 연결하여 차려놓는 것. 가끔은 난해하게, 가끔은 단순하게 내어놓는 법을 나는 가르쳐왔던 것이다. 내가 쓴 글이 아주 나중에도, 늙은이도, 허풍선이도 아니게 살아가는 법을. 이를 문학적 용어로 창조적 기억이라고 한다. <105~106쪽>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김승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132쪽│9,000원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