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까칠한 맨부커상 소설가 줄리언 반스의 ‘요리 사색’
[책 속 명문장] 까칠한 맨부커상 소설가 줄리언 반스의 ‘요리 사색’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9.04.2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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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나는 늦깎이 요리사다. 내가 어렸을 때는 예의 그 고상한 보호주의가 투표소와 부부의 침대, 예배당 등에서 일어나는 일을 에워쌌다. 나는 영국의 중산층 가정에 네 번째로 비밀스러운-적어도 사내아이들에게는 그러한-곳이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곳은 바로 부엌이다. 때가 되면 거기서 어머니가 음식-대체로 아버지가 가꾸는 텃밭의 산물로 만든 것-을 들고 나왔지만, 형이나 나나 그 변형의 과정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 들 만한 집안 분위기도 아니었다. 아무도 요리가 사내답지 못한 일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가정에서 남자가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무엇이었다. <17~18쪽>

섹스, 정치, 종교와 마찬가지로 내가 요리를 알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부모님에게 물어보기엔 너무 늦은 때였다.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그분들에게 묻지 않은 것으로 나는 이제 되갚아줄 작정이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변호사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되는대로 아무거나 섞어 먹었는데, 그런 음식 중에는 범죄와 가까운 것도 있었다. 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상의 음식은 삼겹살과 완두콩과 감자의 조합이었다. 완두콩은 물론 냉동식품이었고, 감자는 통조림 감자였지만, 나는 깨끗이 깎은 감자와 함께 들큼한 소금물을 그대로 마시길 좋아했다. (중략)
그 시절 내 ‘요리’를 좌우한 주요인은 가난, 솜씨 부족, 보수적 미식 성향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장으로 만든 식품을 먹고 살았는지 몰라도 나는 혀 통조림 말고는 그런 조류의 음식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19~20쪽>

일단 요리의 결과가 심각한 실패에서 총체적으로 엉망이 된 수준 사이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그걸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절대로, 부엌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도태의 법칙에 따라서. 그리고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그것은-지극히 일상적인 의미에서-간소한 것이다. <150쪽>
 
『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
줄리언 반스 지음│공진호 옮김│다산책방 펴냄│196쪽│1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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