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기업의 흥망과 인간의 탐욕, 연극 '엔론'
거대 기업의 흥망과 인간의 탐욕, 연극 '엔론'
  • 윤미나 객원문화기자
  • 승인 2014.05.0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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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엔론> 공연 장면 [사진 제공=씨즈온]

[독서신문 윤미나 객원문화기자] 봄, 사랑, 벚꽃에 지쳤는가? 흔한 사랑 이야기나 가벼운 코믹 이야기에 싫증났는가? 흔하지 않은 이야기, 당신의 지성을 일깨울 연극 <엔론>이 지난 7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첫 선을 보였다. 10년이 넘게 재판이 진행 중인 '엔론 스캔들'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기업범죄 사례로 손꼽힌다. 연극 <엔론>은 '엔론 스캔들'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1990대의 '주주 가치 자본주의'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009년 영국에서 초연돼 큰 화제를 몰고 온 바 있던 연극 <엔론>이 한국 사회에는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지 기대된다.

▲ 연극 <엔론> 공연 장면 [사진 제공=씨즈온]

엔론의 거품과 인간의 탐욕

'주주 가치 자본주의'란 주식 시장에서 평가되는 기업 가치의 극대화를 최고의 기업 조직 및 운영원리로 삼는 자본주의를 말한다. 80년대부터 나타난 '주주 가치 자본주의'는 90년대에 월 스트리트 중심의 금융 자본주의가 일반화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70년대까지 미국의 기업들은 더 많은 이들을 고용하고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시장에서나 사회적으로나 그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하나의 규범으로 삼았다. 그러나 80년대부터는 이러한 규범이 흔들리면서, 기업 인수 합병 시장이 확장되어 공격적 기업 인수가 나타났다. 기업주들은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묻지 마' 식의 주가 상승에 목을 매게 된 것이다. 주가 상승을 위해서는 재무제표를 주식 시장의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즉 그럴 듯하게 '거품'을 부풀려야 하는 것이다.

엔론은 1985년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생겨난 에너지 기업으로 순식간에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에너지 기업이 주식 시장에서 사랑받기는 어려웠다. 이때 엔론을 월스트리의 모델에 맞도록 환골탈태시킨 것이 바로 연극 <엔론>의 주인공인 '제프리 스킬링'이다. 그는 '트레이딩'과 '시가 회계' 등의 기법으로 엔론의 주가를 놀라울 만큼 상승시킨다. '거품 부풀리기'를 효과적으로 해낸 것이다. 1996년에서 2000년 사이에 엔론의 매출은 무려 7배가 넘게 상승한다. 이러한 상황은 연극에서 스크린의 주식 화면, 긴박한 리듬과 함께 섞여 나오는 숫자들, 그리고 양복을 입은 트레이더들이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주고받는 대사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을 이룬 엔론과, 그 성장의 주역이었던 제프리 스킬링은 탐욕에 사로잡힌다. 엔론은 문어발식 확장을 계속하기 위해 회계 장부를 조작하는 일까지 벌인다. 연극에서 언급되는 LJM은 회계 장부 조작을 위해 엔론이 설립한 특수 목적 회사로, 제프리 스킬링과 그의 수하 앤디 페스토우는 LJM에 상환의 가능성이 거의 불가능해진 부채를 숨기고 '예쁜' 장부를 꾸며낸다. 연극에서는 '악어 탈을 쓴 사람들'을 통해 부채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들은 어색한 몸짓과 쥐가 찍찍대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로 제프리 스킬링을 압박한다.

미국 정부도 엔론 파산에 책임이 컸다. 정부의 무분별한 민영화에 편승한 엔론은 일부 주에서 천연가스와 전기 공급을 독식했다. 이후 엔론은 에너지 가격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큰 돈을 벌이는데, 특히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정전 사태 등으로 사망자들이 속출하는 사태까지 이른다. 연극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마치 클럽에서 DJ가 즐거운 소식을 알리는 것처럼 독특하게 표현한다. 제프리 스킬링이 중앙에서 주가가 올라간다며 기뻐하고, 엔론의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열에 맞춰 춤을 추고, 한 여자는 흥겨운 목소리로 "캘리포니아의 정전으로 교통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입니다!"하고 외친다. 이는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이기적인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 연극 <엔론> 공연 장면 [사진 제공=씨즈온]

엔론의 폭락와 탐욕의 결말

하지만 탐욕이 계속되진 못했다. 애초에 제프리 스킬링의 기법들은 주주들을 속여 회사의 주가를 높이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트레이딩'은 판매자와 구매자의 거래를 중재하는 서비스임에도 수수료가 아닌 거래 총액을 매출로 잡아 거품을 부풀린 것이고, '시가 회계' 또한 '미래의 수익을 지금 당장 자산 가치로 계산'한 것이기에 실현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회계조작이 드러난 엔론은 파산했고, 회계감사를 맡은 대형 회계법인은 영업 정지를 당했다. 연극에서는 제프리 스킬링이 기자들에게 압박을 당해 환청을 듣거나, 도청을 당한다고 착각하고 낯선 사람을 공격하는 등 탐욕의 참혹한 최후를 잘 보여준다.

80년대 이후 새롭게 나타난 미국의 금융 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장치가 바로 '투명성'이었다. 기업인들도 투자가들도 극도로 탐욕적인 인간들이기에,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된 세계가 최소한의 손을 지키면서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정보가 보편적으로 통용돼야 한다. '주주 가치 자본주의'의 생명을 유지하는 장치가 바로 회계의 투명성과 공정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엔론 스캔들'은 이 최후의 마지노선조차도 넘실대는 금융 자본주의의 탐욕 앞에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엔론 사태는 일개 기업의 비리나 파산이 아닌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전체의 상태에 대한 경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수 목적 회사나 시가 회계의 맹점을 이용한 기업의 가치 불리기는 비단 엔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아가 이러한 문제점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여전히 기업의 탐욕에 의해 이용될 여지가 있다. 어쩌면 회계 감사 법인과의 유착 및 공모가 세계 금융 자본주의 전체에 하나의 '규범'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연극 <엔론>은 다만 미국에서 10년여 전에 벌어진 사태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고, 혹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 연극 <엔론> 공연 장면 [사진 제공=씨즈온]

두산아트센터에서는 매년 상반기에 우리 사회에 화두를 제시하는 작품들을 기획해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 중 두 번째 화두인 '우리가 지속할 수 있는가'의 프로그램 중 하나가 연극 <엔론>이다. 감각적인 연출, 센스 넘치는 대사들, 배우들의 원숙한 연기가 돋보이는 연극 <엔론>은 5월 7일부터 3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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