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브 융의 ‘양심론’
칼 구스타브 융의 ‘양심론’
  • 황인술
  • 승인 2013.03.18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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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생 와이드 철학논술
▲ 황인술 논설위원     © 독서신문
[독서신문] Ⅰ. 생각해보기

칼 구스타브 융 (Carl Gustav Jung, 1875 ~ 1961)
 
“내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 체험하게 된다.”
 
  1875년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한 정신과 의사로 집안은 대대로 의사와 종교인이 많았으며 바젤에서 명성 있는 집안에 속했다. 할아버지는 의사였으며 바젤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외할아버지는 바젤 지역 개신교 목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아버지 파울 아힐레스 융은 스위스 개신교 교회 목사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우울증을 앓았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어머니 병세가 호전되면서 어머니 관심과 영향 속에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했다. 1895년 바젤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했다. 1903년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하였으며 엠마는 그의 비서이자 연구를 돕는 내조자로 충실한 역할을 하였다.
▲ 칼 구스타브 융  
  1904년 정신병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분석에 대한 유효성을 인식하고 단어를 통한 연상 실험을 창시하였다. 그는 단어 연상법으로 프로이트가 『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제기한 억압이론을 입증하고, 이를 ‘콤플렉스’라 이름 붙였다. 1906년 정신분열병 증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907년 융은 오스트리아 빈에 살고 있는 프로이트를 찾아가 교류하면서 연구에 공감하며 친분을 나누게 된다. 융은 자신의 연구업적들에 의해 프로이트의 두터운 신뢰와 인정을 받게 된다. 이후 콤플렉스라는 개념은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융과 부르크흴츨리 병원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인간에 대한 유형을 ‘외향형(外向型)’과 ‘내향형(內向型)’으로 나눈 유형론(Typology)은 큰 공적으로 남는다. 모든 사람들은 외향기질과 내향기질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유형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또한 융의 사상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응용심리학(베이컨, 버클리 등 경험론 철학가로 이어진다.)으로 자신의 생애가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 라고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의 경험에 의해 생성된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론을 전개해 간다. 융 이론에 대한 특징을 현상학적(후설) 입장, 프로이트 영향, 혼(魂, Seele)에 대한 사상, 실용적 성격 등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출처 : 두산백과
 
Ⅱ. 생각 확대하기

마음 구조설
  융학파는 전체 인격을 정신(psyche 프시케/라틴어)이라 부른다. 프시케는 ‘영(靈/spirit)’ 또는 ‘혼(넋/soul)’을 의미했으나, 지금은 ‘마음(mind)’을 의미한다. 인간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은 의식, 무의식이 있다. 마음은 행동과 감정, 태도를 결정짓고 사회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자신이 아는 정신세계는 의식, 자신이 모르는 정신세계는 무의식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상대적이지만 또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 인간의 마음은 선천적으로 전체성을 지향하고 서로 어울려 상호작용한다. 이는 인간의 본바탕 그대로를 뜻한다. 즉, 인간은 전체성을 분화, 조화, 발전시켜가면서 갈등구조를 풀어나간다. 이 전체성에 대한 조화는 융 사상 핵심 키워드다.

1. 무의식
  무의식은 후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개인 무의식과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에게 두루 널리 해당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집단 무의식 있다. 의식은 크게 의식과 자아,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 3가지가 있다.

1) 의식과 자아
  의식(consciousness, 意識)은 물리적 또는 신체적 과정 등에 대립되는 심리적 정신적 과정으로 철학적으로는 능동적 특징을 가진 의지(意志)와 수동적 특징을 가진 지각(知覺)을 포함한 인식의 근본적 조건으로 심리적-정신적 과정을 통칭하는 말이다.
  또한 의식은 무의식(無意識)과 대립되는 것으로 자신의 심리적-정신적 과정의 인식. 무의식을 의식에 포함할 경우에 흔히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고도 한다. 해밀턴(W. Hamilton)은 의식은 정의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가 의식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명백히 알고 있지만 그것을 명백히 타인에게 밝히기 어려운 것은, 의식이 바로 모든 인식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의식의 분석은 일반적으로 의식의 행위(과정)와 의식의 내용(대상)으로 구분되며, 또 그 기능은 인지적(認知的)·정서적(情緖的)·의지적(意志的)인 것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의식 중심에는 자아가 있다. 자아는 의식 중심에서 의식과 무의식, 마음과 관계 맺는 의식의 특수한 콤플렉스로 자아 콤플렉스라 부른다. 흔히 나(Ego, 自我)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아이다.
콤플렉스(komplex, complex) : 현실적인 행동이나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감정적 관념으로 콤플렉스는 전체 인격에서 분리된 작은 인격이며 독립적이고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 융은 언어 연상 시험을 통하여 특정 단어에 대한 피검자의 반응 시간 지연, 연상 불능, 부자연스러운 연상 내용 따위가 이것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강박 관념’, ‘열등감’, ‘욕구 불만’으로 순화.

2) 개인 무의식(personal unconsciousness, 個人無意識)
  무의식(unconsciousness)은 성격이론의 한 개념으로 개인의 발달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어떤 사물·사람·동기·태도 등을 일정한 시점에 경험하였으나 억압되거나 망각(忘却)되어 감지할 수 없게 된 상태 즉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며 무의식을 체계화한 사람은 프로이트이다.    무의식은 의식화 난이도(難易度)에 따라 의식·전의식(前意識)·무의식으로 분류하며 흔히 본능적 충동이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융의 성격이론에서는 개인경험에 관련된 개인무의식과 역사경험에 관련된 집단무의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융은 개인 무의식뿐 아니라 인류 보편 무의식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무의식은 크게 3가지가 있다.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율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무의식은 의식과 대상관계를 이룬다. 보상작용은 무의식의 중요한 기능으로 무의식은 의식의 결여된 것을 보충하고 통합시켜 조화를 이루게 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부조화 되면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3)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융은 무의식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 자아에 근접할 수 없는 정신 내용이라는 의미와, 자체 성질과 법칙 그리고 기능을 지닌 심리 구조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융은 무의식을 단순히 유아적인 개인 경험이 억압된 저장소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무의식을 개인의 경험을 초월하며 인류의 계통 발생적이고 본능적인 기초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보편적 심리활동의 한 형태로 보았다.
  집단은 개인적이 아닌 일반적이고 모든 개인에서 나타나는 똑같은 내용과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집단 무의식 내용은 결코 의식화되지 않는다. 이것은 원형적 과정의 영향을 반영하며, 원시적 이미지 저장소이다. 융은 집단 무의식에 일종의 “지식,” 심지어 사고 능력을 부여하며, 상속적이며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진 가장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행동 유형으로 인류가 태초부터 얻은 모든 경험의 침전물이며 선험적인 틀로 본다.
  즉, 무의식에는 철학적 언어로 심리적 경향성 또는 발달적 흐름의 “최종적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융은 실제적 의미에서 삶에 대한 사건들이 무의식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은 자신의 삶의 유형과 의미를 촉진시키는 궁극적 원인이 무의식에서 작용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무의식의 이러한 측면은 목적론적인 측면으로 언급되었다.
  융의 마음 구조설에서 양심론이 제기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집단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양심에 대한 원형이다. 집단 무의식은 이루고 있는 심리적 원형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아니마 원형과 아니무스 원형이며 자기원형이 있다.
아니마(Anima) 원형과 아니무스(Animus) 원형 
  집단사회에 적응하는 가운데 형성된 외적인격(페르소나)에 대응하는 자신 안에 있는 내적인격(아니마, 아니무스)으로 반대 성(性) 요소를 가리키는 분석 심리학 용어이다. 아니마는 독일어 제엘레(Seele, 심령), 아니무스는 가이스트(Geist, 심혼)에서 온 라틴어로 제엘레, 가이스트라고 하는 말은 혼과 같은 것이다. 혼, 넋, 심령이라는 것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이며, ‘나’의 통제를 받기보다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와 같다고 보고 있다.
  융은 남자 안에 있는 원초적 여성성을 아니마로 불렀고, 여성 안에 있는 원초적 남성성을 아니무스라 불렀다. 원초적 남성성 또는 원초적 여성성이란 집단사회의 전통적인 남성관, 여성관을 말한다.
  원초적 여성성은 여러 가지 다양한 성질을 나타내지만, 남성들이 남성 페르소나로 인해 소홀하기 쉬운 감성(Pathos)과 예감능력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원초적 남성성은 여성들이 소홀하기 쉬운 생각하는 힘(logos)과 지혜의 특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내적인격의 표현은 남성은 주로 기분(mood)으로, 여성은 의견(opinion)으로 나타난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원형이지만, 무의식의 원형 중에 특수한 원형이기 때문에 자아의식을 무의식의 심층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psychopomos), 또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식을 통한 인격의 통합과 분화는 자기실현의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2. 자기원형
  모든 인간은 부분이 아니라 그 자신 전체로 살 것을 요구 받는다. 이는 대극의 과정을 거쳐 하나가 되어 가도록 요구받는 과정이다. 전체가 된다는 것은 분열을 지양한다는 것이다. 마음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불균형이 일어나면 균형을 맞추도록 자율작용을 하는 데 다시 말하면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융은 이러한 심리적 원형을 자기 원형이라 말한다. 자기란 자기실현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다.
  자기란 전체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그것은 인격성숙의 목표이며 이상이며, 의식의 중심인 ‘나’(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전제정신 그 자체, 혹은 그 전체정신의 중심이며 핵이다. 우리가 자아실현이라 하지 않고 자기실현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체정신의 중심핵이라는 곳에서 자기를 말할 때 우리는 특별히 자기원형이라 한다. 자기는 의식(합리)과 무의식(비합리)을 통튼 하나인 그의 자신 전부를 말한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전체가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어 자기를 이룰 수 있다. 자기원형이 무의식의 가능성이라면 자기실현은 자아의식을 받아들여 실천에 옳기는 능동적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는 자아의 결단과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하며 이것이 있음으로 비로소 무의식과 의식의 합일이 가능해진다. 자기원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상징을 보내서 자아로 하여금 전체로 생을 발휘하도록 촉구한다.
  자기실현을 개성화라고도 한다. 모두가 자기 스스로 전체가 된다는 점에서 자기실현이라고 한다면 그 내용상에서 볼 때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에 따라 자기실현은 개성적이며 독특한 것이기에 개성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개성화로 자기실현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원래부터 알고 있다는 점에서 양심(良心, Urgewissen)을 지녔다. 개성화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깨닫고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다. 개성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아의 협력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전체가 되는 것은 자아가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의식화함으로 가능하다. 융에 의하면 인간 마음에는 집단규범에 의한 도덕적 표준이 있고 이와는 다른 그 개체의 원초적인 양심이 무의식에 있다. 이것은 자기원형에 대한 도덕적 측면이다. 이 두 가지를 판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꿈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그 방향을 제시하지만 언제나 뚜렷이 가리켜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선악관과 내적인 충동의 양극 사이의 방황을 감수하고 진정한 내적인 양심의 향방을 찾아가야 하는 때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자기실현은 인간의 숙명적인 과제이다.
- 출처 : 이부영, 『분석심리학 -C.G. Jung의 인간 심성론-』, 일조각, 2011, 119~124쪽.
 
 
 
▲ 1909년 미국 여행 중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프로이트,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클라크 대학의 총장인 G. 스탠리 홀, 그리고 융    



Ⅲ. 생각정리하기
 
1. 양심론
양심의 정의
  양심은 conscience(희랍어)로 suneidesis와 라틴어 conscientia로 뜻은 함께 안다(knowledge with)이다. 독일어 Gewissen도 Ge와 Wissen 합성어로 Ge는 ‘모두 함께’라는 뜻이며 Wissen은 안다는 뜻이다. 때문에 양심이란 개인뿐만 아니라 모두 함께 알고 있는 지적 분별을 말한다. 따라서 양심은 자신의 행위가 상대방에게 미치는 도덕적인 선 또는 악의 영향을 판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양심은 선을 지향하는 내적인 도덕의식이다. 칸트는 양심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지녀야 한다 하였고 맹자는 양심을 ‘양지양능(良知良能)’으로 표현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에게 공손하게 행동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할 줄 알고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천부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을 양지(良知), 양능(良能)이라 부른다.
맹자가 말했다.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은 타고난 능력(良能)이고,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타고난 지능(良知)이다. 두세 살 난 어린 아이는 누구나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고, 커서는 윗사람을 공경할 줄 안다. 어버이를 친애하는 것은 인이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의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인과 의를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진심상15)
- 맹자 『맹자』
  ‘양지’는 선악을 구분하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능력을 말하고 ‘양능’은 선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행위능력을 말한다. 스토아(Stoa)학파는 양심을 ‘아직 반성되지 않은 지각’으로 봤다.(반성되지 않은 지각이란 선과 악을 의미한다.)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선악의 구분을 나타내는 도덕적 판단능력이다.
  페쉬케는 양심의 기초적인 바탕과 핵심은 양지양능이라고 보며 양지양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양지양능은 더 이상 원칙으로 축소될 수 없고 실천에 의하여 직접 알게 되는 궁극적 윤리 원칙들을 지키려는 습성이다. 양지양능에서 나오는 가장 보편적인 원칙은 “선은 행해야 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 목적과 거기에서 나오는 기초적인 윤리 원칙 등에 대한 지식은 역시 이 양지양능의 내재적 기능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출처 : 김희수, 「양심의 속성과 기능에 관한 고찰 : 서양 및 기독교 사상을 중심으로」 , 한국 개혁 신학 논문집, 제 13집, 2003, 214쪽.)

2. 양심의 선천성과 후천성
l) 양심의 선천성
  양심은 선악을 판단하는 생득적인 능력으로 옳고 그름을 알고 선악의 의문을 갖는다고 보는 견해이다. 양심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며,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완전한 것으로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양심은 자명하게 옳고 그름을 아는 직관능력이다.
  칸트는 선악을 실천이성의 대상으로 다루었으며, 그것을 인간 내면에 있는 법정 의식이라 규정한다. 칸트 양심론은 양심을 내면 법정으로 삼는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인간의 내적인 법정의 의식이 양심이다”. 따라서 “거기서 자신의 생각이 서로 고소한다든지 변명한다든지 한다”. 그리하여 양심은 도덕적 자기의식으로 간주된다. 양심이 법정인 한에서 고소하는 인격(원고) 내지 판가름하는 인격(재판관)과 고소당하고 판가름당하는 인격(피고)이 각각 다른 인격이지 않으면 불합리하다. 따라서 양심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고로부터 보아 다른 인격의 존재가 요구된다.
  칸트에 따르면 양심은 인간 본질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감성계와 예지계 양쪽에 걸쳐 존재하기 때문에 양심도 동일한 존재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예지인(homo noumenon)은 감성인(Sinnenmensch) 내지 현상인(homo phaenomenon)에게 있어 다른 인격이라는 것으로부터 이들 두 인격을 두 계기로 하여 양심법정이 성립하는 것으로 된다.
  양심은 객관에게가 아니라 자기(주체) 자신에게 상관하는 관계라는 것으로부터 칸트는 도덕가들의 언뜻 보아 지당한 주장을 배척하여 잘못된 양심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올바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지성이며, 그 점과 관련하여 지성은 자주 잘못을 범하는 데 반해, 양심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행위를 행했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도덕적 판단력’이며, 그 점과 관련하여 양심은 잘못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칸트는 “형식적 양심성”이라고 불렀다. 또한 양심의 활동은 시간적 질서에 따라서 (1) 행위(결심) 이전, (2) 행위 중, (3) 행위 후로 나누어진다.
  (1)은 경고하는 양심이며, (2)는 원고와 변호사가 등장하는 양심, 즉 가책을 깨닫고 변명을 하는 양심이고, (3)이 재판관의 판결로서 나타나는 양심, 즉 후회를 깨닫는다든지 마음의 평안함을 깨닫는 양심이다. (이시카와 후미야스 石川文康)

2) 양심의 후천성
  경험론자 주장으로 사람의 양심은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후천적 요인은 심적 작용을 현실적인 측면으로 파악한다. 이는 양심의 기본개념인 본유적 도덕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로크가 주장한 ‘백지설’(theory of tabula rasa , 白紙說)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천부적으로 주어진 본유관념(本有觀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관념은 후천적(後天的, a posteriori)인 경험을 통해서 이룩된다고 본다.
  인간의 마음은 문자 그대로 태어날 때 백지(白紙)와 같이 아무런 관념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나 혹은 생각하는 모든 사물들은 사실은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우리들의 지식도 감각적 경험을 통하거나 아니면 마음에 반영된 것을 반성하여 얻어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근본적인 관념은 감각의 대상이거나 혹은 반성의 대상이며, 생각된 마음의 작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3) 양심을 보는 2가지 관점
신성설(神性設)
  양심은 사람의 인식 능력을 초월한다. 때문에 예부터 사람들은 양심을 신의 능력으로 돌렸다. 융은 양심을 신의 소리라고 보았다. 이는 양심의 원초적이며, 신성함과 존엄성을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모니온(신)의 소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였다. 따라서 양심은 도덕적 행위의 최고 판단 능력이다. 양심은 어느 곳이든 순수한 활동을 하며 누구든지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양심은 시공을 초월한 불변 진리이다.
능력설
  인간 정신능력은 지각, 기억, 상상, 의지라는 특수한 독립적인 가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심의(心意-mind, seele)는 인간의 모든 능력 종합체인데 이를 양심으로 판단함을 말한다.

3. 양심의 실천
  양심(Gewìssen)은 자신의 행위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책임은 자기 행위에 대한 결과이다.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음은 자신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는 도덕적 양심과 관련이 있다. 책임은 윤리의 기본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신이 윤리적 인간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4. 융의 양심론
  일반적으로 ‘양심’(conscience)이란 함께 안다(knowledge with)는 뜻으로 선과 악을 판별하는 앎으로 쓰인다. 융은 ‘양심’(良心 Gewissen)이라는 말을 특수한 ‘지’(知, Wissen) 또는 ‘의식’(Bewuβtsein)임을 언급한다. 융이 말하는 특수한 지(知)는 우리 행동의 동기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들의 감정적인 가치를 아는 것으로 이것은 객관적 지적 판단이면서 주관적 가치판단으로 복잡한 형태를 지닌다. 양심은 크게 2가지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 합리적, 정신 기능인 의식과 주관적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로 합리적 의식은 기본적인 의지행위나 또는 의식에서는 근거 없는 행동을 하고자하는 충동으로 주로 합리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기층(基層)으로 일종의 정신적 현상을 포함하고 있고 후자는 하나의 가치판단으로 하나의 상충구조로 받아들이거나 배척하거나 하는 주체 판단이다. 주관적 판단이 지적인 판단과 구별되는 것은 그 판단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실질적인 성격이외의 주관적인 관계를 보인다는 점이다. 주관적 가치판단은 어떤 것이 ‘나에게 좋다’ 또는 ‘마음에 든다’라는 전제를 둠으로 언제나 주체를 포함시킨다. 만일 이와 반대로 어떤 것이나 아닌 어떤 다른 사람이 좋고 다른 사람 마음에 든다고 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가치판단이라 할 수 없고 지적인 확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융은 양심을 “‘나’(Ich)에 대한 앎(conscintia)이 아니다. “양심(Gewissen)이 앎(Wissen)이라면 경험적인 주체는 아는 자가 아니고, 아는 자란 이 경우에 무의식적 인격이며, 이것은 여러 면으로 보아 마치 의식의 주체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양심의 무의식적 기능을 알기 위해서는 ‘원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융은 집단 무의식에 대한 원형을 강조했다. 원형은 집단 무의식 구성요소로 의식의 가장 밑바닥 층을 이루고 있으며 강한 에너지 반응을 일으킨다. 다음으로 원형은 신의 세계이다. 원형은 선험적인 침전물이며 이는 시공간과 민족, 문화를 초월하므로 신의 영역에 속하며, 원형은 본능과 뿌리가 같다.    융은 이러한 원형 심상들을 ‘본능의 자화상’ 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원형은 본질적으로 무의식의 내용을 나타내며 그것이 의식화되고 지각됨으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적인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원형은 출몰하게 되고 무의식과 의식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때 원형이 의식화 되면 창조적으로 변하게 되고 자아의식은 더욱더 확장되고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한다.
  - 출처 : C.G 융, 『인간과  문화』, 솔, 2008.

Ⅳ. 논제 찾아보기

  인사청문회는 2000년부터 시작된 제도로 위장전입 문제, 병역 문제 등 위법으로 수많은 후보자들이 낙마를 했다. 지금까지 낙마한 제일 많은 이유는 도덕성 문제였다.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장관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여덟 살 아들 이름으로 땅을 구입하고 수십 년 만에 증여세를 낸 인물, 법을 어기고 위장전입을 하고, 자식에게 집을 물려주면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하고, 이해 할 수 없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 받은 그들을 모습에서 양심이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양심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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