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의 밝고 어두운 그림자
미당의 밝고 어두운 그림자
  • 이재인
  • 승인 2007.07.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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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군편
▲ 미당 서정주 선생의 팔순때 부인 방옥숙 여사와 함께     © 독서신문
미당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의 빛만큼 어둠도 따르지만 글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미당의 문학적 업적은 한 마디로 태산이다.
그는 우리 문학의 질을 한층 더 높였고 우리 시문학의 위상을 고조시켰다. 우리 문단의 숱한 거목을 배출시켰다. 그의 제자들이 지금의 한국문단을 이끌어 가고 있다면 지나친 말이라고 누가 꼬집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의 또렷한 객관적 평가로도 미당은 큰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필력, 그리고 넘치는 문학적 열정, 거기에다 제자와 동료를 알뜰하게 지키는 모습은 그의 허물보다는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미당을 만난 건 내 나이 스무 살 초입에 석탑이 있는 동국관에서였다. 그때 나를 그에게 인도한 사람이 선원빈이었다. 그는 동국대 학생이었으므로 내게 미당의 강의에 청강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 말은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었다. 경기대학 학생으로서 그분을 뵙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당시 서정주 선생은 우리 문단에서 인기가 매우 높은 시인이었다.
당신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와 같이 만인이 우러르는 시인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모습이 나의 눈에도 확연했다. 그러므로 너그럽고 남의 허물과 죄도 끌어안는 모습이 여실이 드러났다.
늘 감사하고 늘 영성이 님과 내통하고 있었다. 그 님은 부처였고 진리였고 사랑이었다.
나의 도강 첫날에 맨 앞좌석에 앉아서 선생의 느슨한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시작법을 가르치다가 나를 발견하곤,
“낯선 청년이 편입해 왔구먼……. 이름이 무엇인고?”
모든 학생이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편입한 속세의 학생이 아니었다. 동국대학에 기부금을 낼 형편도 없었다.
내 이웃에 있던 친구들이 더러는 동국대, 성균관대 등으로 편입해 가기도 했다. 나는 경기대 진학도 마냥 고마워했다. 나를 인정해 주어 학보사 기자까지 시켜 준 학교가 고마운 형편이니 무슨 편입이겠는가?
“전 경기대…….”:
나는 말끝을 흐리면서도 경기대에 힘을 주었다.
“경기대에서 편입했구먼…….”
나는 변명할 여지도 없이 그냥 경기대에서 온 청강생이 그만 동국대 편입생으로 미당의 공증을 얻은 셈이다.
그때 그 강의실에는 오늘의 한국문단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강희근 문효치 선원빈 박제천 조정래 김초혜 홍신선 정의홍 송유하 유우희 명기환 하덕조 등등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들 사이에서 서정주의 시해설과 시작법을 배우면서 내 푸르른 영혼에 돛을 달았다.
후에 나와 경기대 같은 학년이었던 신안군 출신 정지하가 미당 댁을 찾아가는데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나는 좋다고 따라 나섰다. 공덕동 큰길가에 위치한 왜식 건물의 마당이 넓은 집에 미당은 살고 계셨다. 미당은 그날도 사모님 방옥숙 여사에게 술심부름을 시키면서 동서고금의 시인들을 들먹였다.
특히 미당은 ‘조지훈’을 말할 때,
“그 친구 지훈군…….”
이라며 꼭 낮추어서 이름을 말했다.
한국 문단에 유일 독보적인 자존심으로 좋게 보였다.
“등탁, 영종, 그 친구…….”
나는 그의 자존과 느슨함에 반해 버렸다.
“정영일 자네는 정지하로 하게나. 영일은 너무 많으니까…….”
이렇게 하여 정영일이 정지하로 태어났다. 근 20년 가까이 정지하로 필명을 쓰다가 김지하가 유명해짐에 정영일로 다시 돌아갔다.
이렇게 정영일과 함께 무시로 미당 댁을 출입하면서 나는 차츰 어깨너머로 시를 배우기도 했고 그의 박식함에 취하기도 했다.
그러던 인연으로 미당은 나의 수필집 『황야의 아침』서문을 써주시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오늘 미당시문학관을 찾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순례자의 길을 나선 것이었다.
미당시문학관을 가는 길은 수원에서 출발했다.
아침 일찍이 짐을 싸면서 오늘은 미당시문학관 뜰에서 국화 몇 포기를 내 집 「예산문학관」으로 옮겨 오기로 작정을 했다. 선생님의 영혼을 꽃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그것이 소중한 일이었다.
미당시문학관의 관장은 우리 시단의 원로인 김정웅 시인이 맡고 있다. 그분의 초청으로 지난해 국화꽃 축제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나의 개인적 사정으로 못 갔었다.
오늘의 미당시문학관에 가면 관장 김정웅 시인으로부터 직접 설명과 해설을 들을 것 같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 선운사 도솔암 마이애불(보물 제 1200호,좌)과 선운사 6층석탑(지방 유형문화재 제 29호,우)     © 독서신문
서해안 고속도로는 현충일을 하루 앞두고 정말 한산했다. 서해안의 갯벌, 아직 개발되지 않은 해변이 내가 살던 옛날 고향집처럼 아늑하고 친숙하게 느껴짐은 미당 때문일까?
가다 쉬고 가다 쉬는 미당고댁의 순례의 길은 왠지 부담 없는 삼촌 댁을 찾는 것처럼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미당시문학관은 선운리에 위치해 있었다. 폐교인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개조하여 9,461㎡에 4동의 건축물을 만들고 2001년 11월에 개관한 문학관이었다.
영상실, 세미나실, 휴게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전시실에 미당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각종 사진자료와 운보 김기창 화백의 미당 초상화, 선생이 쓰시던 만년필, 인장 등 1만 5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당시문학관은 재단법인 미당시문학관 운영, 관리하고 있는데 잘 손질된 정원과 경관이 관광객의 시선을 끄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행사로는 미당대상제, 미당추모제, 국화꽃 축제, 학생백일장, 문학강연회 등이 있었다.
시설을 이용하는데 문인단체, 시민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어 좋았다.
요즘 우리나라 농어촌에는 볼거리, 먹을거리를 개발하고 이를 고조시키는 축제가 많이 열리고 있다.
고창에도 국화꽃 축제 이외의 다른 이벤트를 마련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당의 생가와 변산반도
▲ 미당 서정주 선생의 복원된 생가(본채와 문간채)     ©독서신문
미당의 생가는 뒤로 산과 앞으로 확 트인 들판 끝에는 변산반도의 수려한 전경이 펼쳐져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 기가 찬 마을에서 동양의 시신(詩神)이 탄생하기 않을 수 있으랴싶은 마을이다.
미당이 살던 옆에는 그의 동생 시인 서정태 선생이 살던 집이 6월 초여름 정적 속에 묻혀 있었다. 주인 없는 뜨락 댓돌 위에 흰 고무신 한 켤레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지세와 마을이 사람을 만든다. 배경과 아름다운 풍광은 미당 서정주를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그가 큰 인물이 되었던 것이 결코 지세와 무관치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태평양 바다 물결이 드디어 변산반도를 휘감고 줄포만을 들락거린다. 사철 싱그러운 청솔 계곡과 소요산의 산 그림자가 마을을 휘감아 내린 질마재의 정경은 사람을 자꾸만 어질게 한다. 그러니 미당이 어찌 큰 사람이 아니 될 수 있겠는가?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에서 서광한(徐光漢)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2년에서 24년까지 마을 서당에서 한학 수업을 받았다. 1924년 부안군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 5년 만에 수료했다. 서울로 상경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11월 광주학생 운동 주모자 4명중 하나로 지목받아 퇴학,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이내 권고 자퇴하였으나 1933년 박한영(朴漢永)대종사 문하생으로 입문, 동국대 개운사 대원암내 중앙불교전문강원에 입학, 1935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 하였고 이듬해인 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당선하여 가을에 휴학 했다.
그리고 11월부터 <시인부락>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약했다. 이때 동인으로는 김동리, 이용회, 오장환 등이었다.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하여 1940년에 승해가 출행했다. 1941년 가족과 함께 상경, 동대문 여학교 교사로 부임, 첫 시집 <화사(花蛇)>를 출간 했다.
1946년 제2시집 <귀촉도>를 출간, 부산 동아대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하였고, 1948년 봄에 <동아일보> 사회부장, 문화부장을 역임했고 문교부초대 예술과장을 역임했다. 이어 휴직했고 1949년 정부수립 후 한국문학가협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1년 전시연합대학 강사 겸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다가 광주 조선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54년 서라벌 예술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동국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미당은 2000년 12월 2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를 써왔고, 시인으로서 긍지를 지니고 사신 분이다. 시성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시인이다.
미당은 78세 나이로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하여 세계의 명산 1625개를 매일 아침마다 기도처럼 외우는 등 노익장을 보여주었다.
미당은 특히 한국시단에 1백여 명에 가까운 시인을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시체가 막 흙으로 변화되기 전에 친일 운운했다. 부관참시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못된 영웅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지금 질마재를 거니는 필자의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사 속세에 귀와 눈과 마음을 씻고서야 문학을 하는 인간들이 옛날보다 줄어들음에서 일까? 나는 어느새 미당의 시 한편을 읊조리며 미당시문학관 전망대에 올라섰다.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사향 방초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뿐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  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 고창 선운사 전경     © 독서신문
미당 서정주의 초기 시 <화사>이다. 인간의 원죄의식과 생명적이고도 육정적 갈등을 이 꽃뱀으로 의인화시켰다. 시어가 주는 상징성과 유혹적 쾌락과 갈등을 과감하게 표출하고 있다.
▲ 이재인(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경기대 국문학과교수)     ©독서신문

<원통히 물어 뜯어>, <우리 순네 스물난 색시> 등 생명적이고 육정적인 갈등을 유감없이 운율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 이 어찌 한국 시단을 한 계단 끌어 올린 공적이라 하지 않으랴?
미당의 육신은 아쉽게 이승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시와 시정신은 오늘도 우리의 곁에 살아있다. 동국대 교정에도, 한국문단의 숲에도, 사양길에 들어선 출판가 뒷골목에도 낭만적 방랑자 서정주는 살아있다.
그의 <국화 옆에서>와 함께
 
<다음은 해외 영국편입니다>
읽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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