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장품]구상 시인의 마지막 작품 '기도'
[나의 애장품]구상 시인의 마지막 작품 '기도'
  • 주영숙
  • 승인 2009.03.24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 독서신문

 
나의 애장품을 말하라면 단연 시인 구상의 육필로서, 내 세 번째 시집 ①[비밀낙서첩](1991)에 주신 서문(원고지5장). ②청마 유치환의 시 「溪山」을 화선지에 옮겨 쓴(1983) 서예작품, ③육필 시 「홀로와 더불어」, ④꽃 물린 화선지에 쓴 육필 시 「기도」이다.
위의 ①을 제외한 ②③④는 모두 2002년에 선물 받은 것이다.
 
그해 여름방학, <문인인장 박물관> 관장 이재인 교수의 부탁으로 감히 인장을 기증해 주십사하고 구상 선생님을 방문하였다. 물론 구상 선생님의 유명한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고 하는 시를 베껴 쓰고 모란을 그린 부채 몇 점을 가져가긴 하였고, 선생님의 시를 그린(?) 내 작품에 선생님의 낙관까지 받았지만, 인장이 딱 한 벌뿐이라 그것을 기증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가 인장을 새로 새겨다가 드리는 대신 쓰던 인장을 기증하기로 합의를 보았는데, 다음날 꼭두새벽부터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내가 내 시를 직접 써서, 거기다가 낙관을 하면 안 되겠나?”
  “그러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어떻게 글을 쓰시려구요?”
  “괜찮아. 술 한 잔 마시면 손이 떨리지 않는다고.”


오랜 수전증으로 ‘구상’이라는 딱 두 자를 적는데도 한참이 걸리는 형편을 너무 잘 아는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예에?”라는 소리만 내었다.

“할 수 있어. 도전해봐야지. 이달(7월) 말일까지 해 줄게.”

그렇게 되어 1차로 선생님의 육필 시(“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를 받아 구상 시인의 인장 대신 이재인 교수께 갖다드리려고 챙겨두었다. 그랬는데 며칠 뒤에 선생님이 또 전화를 하셨다. 당일에 쓰니 너무 조급하여 작품이 잘 안 나오더라, 그러시고는 말씀에 힘을 주시는 거였다. “내가 또한번 독약을 마셔야겠으니 내일 세 시쯤 오라고.” 그래서 약속 시간에 맞추어 선생님을 뵈었는데, 선생님의 모습이 몹시 초췌하였다. 좀더 잘 써 지려나 싶어 그 독한 양주를 정량 초과하여 마셨다가 그대로 혼절하여 한 밤중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랬는데도 어느 틈에 글씨를 쓰셨는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무리를 하신 것이다. 다시 이승으로 오신 김에 ‘난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밤새 쓰신 것이다. 전체 연의 글씨들이 하나같이 삐딱하여 통째 기울어진 형국이지만 한자 한자에 혼신의 힘이 서린 「홀로와 더불어」(③)…. 선생님은 밑에다가 ‘84세에 적음’이라고 양해의 말을 적어 넣고도 당신의 그 작품이 또다시, 아무래도 미흡하셨던지 젊고 건강했을 적에 화선지에다 쓰신 서예작품(②)을 내오셨다. “참 재미있지? 옆에 먹물이 한 방울 튀긴 걸 보니, 이래서 남을 못 주고 남아있었던 모양이야. 이걸 주께.”

그 며칠 뒤에 구상 선생님께 안부전화를 하였더니, 아뿔싸, 내가 다녀간 다음날에 기어이 119에 실려 가셨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으로서는 작품을 그것으로 끝낼 수는 없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인사동에서 사온 화선지와 화선지 사이에 꽃이 들어있는 화선지가 ‘꽃자리’와 너무 닮아 두 장으로 나누어 한 장에다만 ‘꽃자리’ 시를 쓰고 한 장은 그냥 드렸었는데, 선생님은 바로 그 꽃자리에 기도를 새기고 내 이름까지 적어 도로 선물(④)해주시며 “이것이 내 최후의 작품이라네.”라고 하시는 거였다.
 
시인은 약속을 지키려고 독약을 세 번 마셨나보다. 

한번은 ‘나는 내가 지은 감옥에 갇혀있다’를, 한번은 ‘홀로와 더불어’를, 그리고 한번은 약속도 안했는데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눈을 뜨게 하소서’라고  꽃자리 닮은 화선지에 기도를 새겼나보다.
 
/ 주영숙 시인 <한국예술가 애장박물관 제공>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