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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에 영혼을 천국에 실어 나르는 꿀벌과 나비가 떼 지어 날아오르던 화창한 봄날. 마치 오영수 소설의 「남이와 엿장수」는 아니지만 고물을 파는 엿장수 그의 엿판에는 방금 어느 집에서인가 엿과 바뀌어 온 동판(銅版)이 실려 있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처럼 내가 바로 그 동판에 찍힌 거룩한 문인들의 이름을 발견해 냈다. 100여명의 문인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었다. 시인 구상에서 함동선, 홍윤숙 선생까지 발기된 「꽁초 오상순 문학상」 제정 기념패였다.
「선생님, 제가 이 패(고물) 사드릴까요?」
「그건 와?」
「여기 선생님 존함과 그리고 꽁초 선생님과 인연이 특별하니까요.」
「놔 두그라. 인연 있으면 누가 가져가겠지...」
나는 선생님의 명령을 조용히 거부하고 그 엿장수와 흥정 끝에 쌀 한말 값을 치르고 이 패를 샀다. 그 날 귀가 시 아무 말 없이 꽁초 오상순 문학상 제정패를 이형기 선생님 신발장에 넣어두고 나왔다.
나와 이형기 선생의 만남은 공식적으로 65년 서대문 경기대에서였다. 당신은 강사로 나오셨는데 젊고 똑똑하고, 그리고 감성적인 분으로 인기가 대단하셨다. 그 분 밑에서 내가 문학수업을 하였다는 것은 생의 큰 기쁨이고 자랑이다.
선생님은 내가 대학 졸업이 가까워오자 불충한 나를 이끌고 신구문화사 신동문 시인한테 끌고 가서 무조건 편집사원으로 추천하셨다. 신동문 선생께서는 우물우물 하다가 3일 후에 쯤 연락을 주겠다고 하시곤 우리와 헤어졌다. 나는 이 소식을 이형기 선생 사모께 보고하였다.
「안돼요. 이재인 씨는 안정된 직장으로 교사가 적격이지요. 내가 신 선생님께 취직 취소할거에요.」
이렇게 돼서 나의 신구문화사 취직은 없던 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더 좋은 일은 충남 예산고교에서 나를 채용하겠다고 하여 첫 부임지로 가게 되었다. 그 후로 선생님은 나의 문학지도의 스승으로 오영수 선생 다음으로 존경하고 있다.
그런데 2000년 7월 17일 나는 문학관을 신축하면서 문인들이 사용하던, 말하자면 애장품을 수집하였다. 그것이 테마로 문인들의 저서에 찍혀 있던 인장인데, 인장 그 옆에 이형기 선생님네 집에 신발장에 사서 넣었던 꽁초 오상순 문학상 제정 기념패가 생각났다. 나는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 돌려달라고 앙청하였다.
「내 그럴 줄 알고 잘 닦아 선생님 서재에 모셔다 놓았으니 가져가세요.」
사모님이 기름칠을 하여 잘 닦아 놓으신 이 기념패가 8년간 한국문인 인장박물관에 소장됐다. 빛나는 시인들의 이름이 줄줄한 이 기념패에는 생전에 오상순 시인의 근엄한 얼굴도 들어있다.
이런 사연과 인연이 있었던 문인 애장품을 이제 한국예술가 애장박물관으로 시집보낸다.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시집보내는 아빠의 마음이다. 이 꽁초 오상순 문학상 제정 기념패가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가? 새삼 시인 이형기 선생님의 무심한 말씀이 떠오른다.
이 재 인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예술계》신인상 공모에 당선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악어새』, 『뱀삿골 오딧세이』, 『소설 정중부』 등이 있으며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1989), 조국문학상(1986), 농민문학상(2004) 등을 수상함.
현재 경기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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