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춘천옥 (14회)
소설 춘천옥 (14회)
  • 김용만
  • 승인 2008.05.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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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을 넓혔다. 그래도 광택차가 줄을 이었다. 웬만한 작은 기스(상처)는 내가 직접 칠로 땜까지 해주었다. 빠대 바르는 솜씨가 익숙하지 못할 뿐, 차 색깔을 맞추는 건 대충 흉내낼 수 있었다.

도꼬이(단골)가 줄을 이었다. 대구 돈 다 긁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12시 통금이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야간작업하기가 일쑤였다. 순찰을 돌던 경찰관이 통금시간인데 어서 일을 끝내라고 재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에만 미치다 보니 내 꼴은 거지꼴이었다. 수염을 깎을 새도 없었다. 신은 작업장이 기름투성이어서 투박한 검정 고무신을 신어야 했는데 깨끗한 운동화를 신으면 금방 망가졌다. 나는 그 거지꼴이 자랑스러웠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일을 하다 말고 공장 옆에 있는 다방에 갈 일이 생겼다. 대구에서 가장 큰 ‘제일택시’ 사장을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다방 안에는 톱밥난로가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난로 곁으로 가서 몸을 녹이며 홀을 두리번거렸다. 저쪽 구석에서 제일택시 사장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누가 내 배를 쳤다.

“어서 나가!”

다방 마담인 듯싶었다. 나를 거지로 본 모양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사장이 앉아 있는 자리에 가 앉았다. 대구에서 가장 큰 택시회사 사장이 그 거지를 반기는 모습을 본 마담이 얼른 동석하며 사죄하는 뜻으로 아양을 떨었다.

“이를 우쩌먼 좋으니꺼.”

“아이, 명덕공업사 김사장을 모른다카이 말이 되나.”

사장이 껄껄 웃자, 마담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서비스로 위스키티 두 잔을 챙겨오며 홀에서 서빙하는 종업원 아가씨들을 불렀다.

“느그들은 김사장님 얼굴도 모르나? 내가 이레이 죄를 짓도록 놔두게 말이더. 응?”

“지들도 매일 명덕공업사에 커피배달은 하지만도, 이분이 사장님이신 걸 몰랐심더. 종업원인줄 알았심더. 저런 분을 우째 사장님인 줄 알갔능교.”

“자네들 말이 맞아. 난 사장이 아냐. 그냥 일하는 사람일 뿐야. 마담, 위티 고맙게 들겠소.”

나는 넉넉한 웃음을 날려주었다.

그 무렵 나는 대구에서 가장 큰 1급정비공장의 차를 대당 얼마씩 광내주기로 약조했는데, 노임을 계산할 때였다. 나는 그 공장 송사장과 구내식당에서 계산을 보다가 서로 액수가 달라 따질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25만원만 받으면 되는데도 송사장은 28만원을 주는 게 맞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때 옆자리에서 차를 마시던 신사가 끼어들었다. 그는 송사장의 친구로 그쪽 편을 들었다.

“여보시오. 우리 송사장은 누구와 싸운 적이 없소. 신용으로 따지자면 귀신도 당해내지 못할 사람요. 아마 댁에서 착각하셨을 거요.”

그러자 송사장이 친구를 나무랐다.

“이 사람아, 확실히 알고나 끼어들어. 지금 더 달라 덜 주겠다 싸움이 아니라, 더 주겠다 덜 받겠다 싸움이란 말야.”

아름다운 싸움이었다. 세상의 모든 싸움이 이런 식의 싸움, 서로 자기가 양보하겠다고 다투는 그 어이없는 싸움이라면, 이 세상은 과연 아름다운 이상적인 세계일까? 혹 사람 사는 맛이 없는, 너무 단순하고 지루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     ©독서신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이제 그런 내 ‘순진한’ 처신이 혐오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지금까지 그런 무거운 의식 속에 갇혀온 것이 두려울 때도 있다. 요즘은 가벼워지고 싶다.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는 존재가 되고 싶다.

내 무거운 하중이 이제는 지겹고 힘든다. 가볍고 환한 세계를 지향하고 싶다. 떠들고, 노래부르고, 사기를 치고 싶다.

남을 속이고 싶다!

남을 속이는 재미로 내 철학을 만들고, 남을 속이는 기술로 내 종교를 만들고 싶다!

그런 맛에 빠져보자!

이제는 더 주겠다 덜 받겠다가 아니라, 덜 주겠다 더 받겠다고 떼쓰는 그런 내가 되겠다.

대구에서 다시 거지가 된 것은 화재 때문이었다. 공장에 처음 불이 났을 때는, 불나면 재수 좋다는 덕담을 들을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지만, 이듬해 두 번째로 (공교롭게도 같은 달 같은 날에) 불이 났을 때는 완전히 알거지가 되어 서울로 떠나야 했다. 공장에 주차한 고급 승용차들을 여러 대 태웠는데, 화인은 종업원이 몰래 휘발유를 빼 팔려고 밤에 주차한 차에서 기름을 빼다가 숙직실 연탄아궁이에 인화되었던 것이다.

나는 옷 보따리만 챙겨 서울로 떠났다. 봉천동 변두리에 싸구려 월세방 하나를 얻어 치매 걸린 어머니까지 5식구가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참담한 시절이었다. 공사판 인부로 겨우겨우 끼니를 때울 지경이었다. 어린 자식들과 굶어지낼 때는 대구에서 차라리 불태운 승용차들을 변상해주지 않고 그냥 서울로 도망칠 걸, 하고 후회할 정도였다.

양심을 지킨 탓에 현실적으로 얻은 건 하나도 없고, 공사판에서 천대받으며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 뿐이었다. 친척들도 반기지 않았다.

“양심이 밥 먹여줘요?”

우리 옆방에 세 들어 사는 술집 아가씨의 말이었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 공사판 인부를 거쳐 리어카 배추장사를 시작한지 두 달쯤 지나서였다.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여자. 그녀도 양심을 지키느라 직장 생활로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술집에 나간다고 했다.

“사기꾼이 젤 부러워요. 존경스럽고요. 제가 이제 터득한 건 그거에요. 그게 진리죠.”

“사기를 생존전략이라며 눈감아주는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린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거라구.”

“제가 사기꾼이 돼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죠. 허무극복에요. 허무극복은 인생을 장난으로 보고, 장난치는 기술을 익히는 일인데, 그 기술이 바로 사기술이죠.”

나는 정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새롭게 느껴졌다. 저 여자가 정말 술집 여자란 말인가.

“함께 나가요. 제가 술 한잔 살테니.”

그녀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젊은 여자한테 술을 얻어 마시는 게 민망해서 사양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냈다.

그녀의 이름은 민희,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사랑한 남자한테 모든 걸 잃었다고 한다.

“어찌 생각하면 그 인간이 고마워요. 일찍 저를 개명시켰으니까요.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보여요.”

그녀는 일주일 후에 아무 말 없이 떠났다. 나를 술로 유혹하던 날, 그녀는 내 몸을 껴안으며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사기란 단어에 매력이 느껴져요. 오라버니가 저처럼 사기란 단어에서 매력이 느껴질 때쯤 한번 찾아올게요.”

민희가 예언한 대로 내가 ‘사기’란 단어에서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자그마치 25년이 지난 요즈음이다. 민희가 27살에 터득한 진리를 나는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깨달은 셈이다. 아름다운 여자의 몸매에서처럼, 나는 이제야 사기란 단어가 신비스럽고, 그 단어에서 섹스감정이 느껴진다. 그동안 나는 ‘진실’이란 단어에서 섹스감정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진실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

민희가 보고 싶다. 지금 52살이겠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노회한 사기꾼이 되었는지.

“사장님 계셔?”

춘천옥 저녁 장사가 시작될 무렵, 누가 카운터 경리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서 장사준비 상태를 점검하던 나는 몸을 숨긴 채 카운터 쪽을 살폈다. 출입문 쪽에서 예비군복을 입은 장정 칠팔 명이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온다. 나를 찾는 사람은 예비군 중대장을 맡고 있는 설계사무소 소장이었다. 건축과를 나와 rotc 장교로 제대한 그는 무척 나를 따랐다. 아마 동원훈련을 끝내고 대원들과 술 생각이 나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사장님, 우리 사단장님을 잘 아세요?”

주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자 그가 호들갑을 떤다.

▲ 김용만(소설가,한성디지털대 문창과교수)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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