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그림책에서 만나요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그림책에서 만나요
  • 스미레
  • 승인 2024.03.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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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만큼 어려운 게 세상에 또 있을까. 정말이지 이건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를 일이다. 탯줄로 연결되어 있을 때, 말 그대로 우리는 하나였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며 이야기는 달라졌다. 마치 지문처럼, 아이와 나의 새겨진 모든 결이 애초에 다른 것만 같았다.

그토록 다른 한 지붕 두 생활자. 아이와 나의 접점이 되어준 건 마침내 그림책이었다.

‘엄마, 나는 차가 좋아요.’‘나도 이렇게 물놀이하고 싶어!’말 못하는 아가는 오랫동안 내게 그림책으로 말을 걸어왔고, 그걸 뒤늦게 알아챈 나는 월동 준비하는 다람쥐마냥 바지런히 그림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할 무렵, 아이가 찾은 의외의 책 자리는 부엌이었다. 아이는 왜인지 부엌을 좋아했다. 수시로 들락이며 살림을 꺼내고, 텃밭 열매를 씻어주던 조그만 아기. 그 애가 부엌 어딘가에서 그림책을 뽑아와 내 앞에 내밀면 이제 그런 일들마저 다 지루해졌다는 신호였다. 부엌에는 책이 많다. 부엌과 책. 모두를 애착하는 사람인지라 거기서 밥도 짓고 책도 읽는다. 누구 하나 그러자 하지 않아도 거기에 그림책이 있으니 시작되는 놀이가 매일 벌어졌다. 복닥복닥 어수선해도, 찬장 속에 그림책을 넣어두고 그날에 맞춤한 책을 골라 곶감 내주듯 읽어주는 일은 매일 즐거웠다.

‘부엌용 그림책’은 따로 모은다. 따뜻하고 밝은 책, 진심 어린 염려와 격려가 담긴 책들이 내 부엌에 산다. 그 책들만큼 좋은 육아 동지를 여전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아이와 뭘 할까, 뭘 먹을까 하는 궁리 끝에는 늘 그림책을 펼친다.

그중 유달리 마음 가는 책이 ‘엘리엇의 특별한 요리책’이다. 30년 전쯤 출간된 오래된 그림책. 나는 이 책을 아이를 낳기 한참 전인 2008년 종로의 헌책방에서 샀다. 작가가 크리스티나 비외르크라니, 가슴이 두근거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서너 살 되었을 무렵, 마침내 이 책을 꺼내 함께 빵을 굽고 수프를 끓였다. 책에 나온 채소를 마당에 심고, 샐러드를 만들었다. 식구 모두 이 책에 나오는 빵을 좋아해서 요즘도 자주자주 펼쳐본다. 통밀가루, 우유, 소금, 이스트만 넣고 굽는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빵. 그래도 그 정직한 맛에 끌려 주말이면 즐겁게 구워 따뜻하게 나눠 먹는다.

날이 궂어 밖으로 나설 수 없는 날이면 부엌은 더욱 분주해진다. 거기서 아이와 그림책을 읽다 번뜩, 메뉴를 정하고 재료를 엮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아이도 나도 그런 순간을 좋아하는 탓에 집안 곳곳이 그림책으로 찰랑인다. 온종일 우리가 다닌 만큼 따라다닌 그 책들은 모두 귀엽고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엄마, 있다가 책에서 만나요!”

나를 세워두고 놀이에 몰두할 때, 아빠와 집을 나설 때, 혹은 잠에 젖은 목소리로.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면 등장인물과 아이, 엄마인 내가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책 한 권에 두 가슴이 하나로 엮이는 마법의 순간. 아이는 그 순간을 ‘만난다’라고 표현한 게 아닐까.

어느새 십 대인 아이에겐 스마트폰도 카톡도 없다. 요즘 애들하곤 그런 게 없으면 소통이 안 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부엌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낡은 그림책들을 떠올린다. 그러면 ‘우리에겐 그보다 더 강력한 끈이 있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금세 든든해진다. 마치 탯줄처럼, 지금껏 우리를 이어준 끈이 이 그림책들이었음을 기억해주길. 하는 바람은 여기에다 먼저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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