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작가 이재인
소년 작가 이재인
  • 이재인
  • 승인 2006.06.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⑨

▲ 이재인 (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아동문학가 이희철 선생과 나의 인연
 이희철 선생은 나의 막내 남동생의 5학년 때 담임이셨다. 그 분이 우리 관내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인 것은 이미 「서울신문」어린이 판에 동시를 실어 몇번인가를 읽은 일이 있었다. 나로서는 열일곱 살 때였던가 싶다. 고구마 한 바구니를 들고 소재지 광시 양곡 창고 옆집 침침한 셋방으로 찾아갔다.

 내가 문학청년인 것을 말하고 장차 큰 소설을 쓸테니 기대해 달라는 비전을 제시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올 때 선생께서는 그 고구마 바구니에 알사탕을 한 봉지 넣어 주시던 기억도 있다. 그 분이 2년간 머무르다가 덕산으로 전근을 가셨고 얼마 후에는 명예퇴직을 하셨다는 소식이 묻어왔다.

 그런데 내가 부천으로 직장을 옮겨갔는데 그분께서는 인천에 와 살고 계셨다. 우리는 서로 간 문인으로 서 오가면서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은 그 흔한 인천 문화상 같은 것도 타시지 않았다.
 당신이 상을 받기 위해 흙탕밭에 들어가기 싫다는 성격에서였다. 후배들이 양보하여 상을 받으라면 혹 모르되,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겠다는 청렴, 바로 그것이었다. 그분은 여유 있는 삶을 살으셨다.  좋은 직장에서 부를 누리거나 명예를 추구하지 도 않았다.

 집안에서는 자상한 남편, 인자한 아버지, 평생 글만 쓰려는 아동문학가였다.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고 착하고 의롭게 사신 선배였다. 원적은 강원도 철원이었다. 그러나 예산 고덕에서, 덕산에서 또한 광시등지에서 교직으로 30년을 봉직한 참교육자요, 스승이었다. 예산이 품었던 외로운 훌륭한 작가이셨다.
 


시인 서창남 선생과 인연
 서창남 선생님은 광시 양조장 댁 윤병희 회장님의 사모이시다. 대구 달성 서씨로 일제시대 자신이 골양반으로 창덕 고녀를 졸업하신 것을 긍지로 아셨다. 이미 40대 나이에 「네잎크로버」라는 시집을 상재하여 인근 동네에 시인으로 이름이 자자한 현대식 여성이었다.

 그는 아동문학가 윤석중, 평론가 김운학 스님 등과 평소 가까이 하셨다. 그러나 젊은 문학청년들을 아껴 늘 주변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소문처럼 그러한 분이 아니었다. 부유한 집, 많은 학식, 높은 지위를 지닌 양조장댁 사모님은 때때로 면민들의 원성도 사게 되었다.
 세무서 직원이 밀조주 단속과 가택조사로 밀주가 발각되면 벌금으로 패가망신이 되는 셈이었다. 그래도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사람들은 은밀하게 술을 담그게 되었다. 그래도 그 조사꾼들에게 들키게 되어 마침내 벌금을 물어내는 집들로부터 양조장은 원망과 저주를 얼마든지 받게 된다.
 그런 원망은 술의 매상이 떨어지면 양조장에서 세무서 조사반을 투입한다는 게 들킨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서선생님은 시집도 두 권이나 냈다. 아들이 높이뛰기 국가대표 선수로 키웠고 자녀들 교육을 잘했다.
 그런데 시골재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간 후 마침내 중병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여류문인이요, 마지막 육석 동인의 한 사람이었다.
 
시인 한성기선생과 나
 누구의 입에선가 한성기 시인이 예산에 와서 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전봉건 시인과 함께 「현대문학」지 추천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분은 대전사범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께서 건강상 학교를 그만 두고 요양차 예산에 와 계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문학청년으로서 그가 예산읍 읍내리 주요소 옆에 살고 있다는 집으로 찾아갔다. 그가 살고 있는 뒷산에 아카시아가 단풍이 누렇게 들어 몇 잎이 시나브로 떨어지던 늦가을 날이었다. 방문을 열면 토방도 없는 단칸방에서 나의 목소리에 놀란 얼굴로 사모님이 문을 밀었다.

「뉘신데유?」
「광시에 사는 이재인입니다…….」
「광시라면? 우리 새우젓 아직 있어유…….」

 아마 광시를 광천 독배의 새우젓 장수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새우젓 장수가 아니라 저는 문학을 공부하는 청년입니다. 한성기 선생님을 뵈러…….」
「아, 그래유? 조금 있으면 오실거유. 지금 뚝방 길에 산책 나갔는데 돌아오실 시간이 다 되는구먼…….」

 사모님은 경계하는 빛이 없이 나를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의 따님이 어머니로부터 지청구를 얻어먹었는지 방구석에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잠시 후 선생님이 오셨다. 쟁반처럼 넙적한 얼굴. 후리후리하게 큰 키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계셨다. 나의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존칭어를 쓰면서 대해주셨다. 자신이 현재 중도일보 예산 총국장이라고 하셨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이 짓을 한다면서 신문에 두를 띠지를 작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거들었다.

「소설가 지망생이라구요?」
「예, 오영수 선생님을 사사하고 있는데유…….」
「그래?」

 한선생은 의외라는 듯이 당신도 오영수 선생을 잘 아신다고 했다.

「소설 쓴 것 있어요?」
「예….」
「그런데 그건 길어서 안되고 수필 쓴 것 있으면 가져와요. 내가 중도일보 문화면에 실어주지…….」
「그래요?」

 나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겸손히 뒤를 빼는 게 아니라 냉큼 대답을 하고 말했다. 나는 내가 들고 온 고구마 바구니를 향해 선생 앞으로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가 가져다 드리래요.」했다.
「그래요? 고맙다는 말씀 전해줘요.」
 한선생님께 나는 꾸벅 절을 하곤 금방 작품을 써오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나는 중도일보에 서너 차례 잡문을 썼었다. 그리고 대학 입학 후에도 한번. 이러는 사이에 나는 이미 작가의 데뷔자격으로 중도일보 문화면에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대학시절에 벌써 예산의 「肉石」동인회에 참여하여 제 5집부터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한성기 선생님의 주선으로 나는 청년 작가로 예산의 동인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오영수 선생님께서 낚시 차 우리집에 오신다는 것을 말씀드리자 한선생님께서는 예산 농전 교장선생님에게 전화로 「특강요청」을 했다.
 물론 농전에서는 무조건 환영, ok였다. 언제 오영수 선생님 같으신 분을 모실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어 오영수 선생님은 낚시복장에 장화를 신고 단상에 올라 어눌한 소설 특강을 하셨다.

후일 한성기 선생님은 후조처럼 조용히 예산을 떠나셨다. 이십 전 후 대전 진잠에서 만나 뵜었다. 청주의 김효동 선생님의 시를 시문학에 추천해달라는 것이었다.
 한성기 선생은 시도 좋지만 정이 많고 자상한 분이였다. 그가 작품도 좋지만 현대문학지 추천 심사위원을 맡게 된 것도 여러 가지 속에 인품을 고려했으리라.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