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실천문인협의회, 그리고 귀향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그리고 귀향
  • 이재인
  • 승인 2006.06.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⑦

▲ 이재인(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103人 중 하나였다
 나는 유신시대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이었다. 이 회원에 가입된 것도 이문구 형의 권고였다. 그리고 회원에서 슬며시 이름이 사라진 것도 이문구 형의 배려에서였다. 당시 나는 부천시 소명여자종합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천주교 재단인 학교로서 이사장 명의가 김수환 추기경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가수녀회에서 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다. 얼핏 수녀나 신부가 학교를 경영하면 좀 공립학교보다 뼈대가 있고, 자율성이 확보된 것으로 알고 있는게 사회의 통념이다.
 그러나 사립학교도 교육위원회의 지시와 통제, 그리고 재정을 지원받다보니 자연 교육청이나 교육위원회의 지배를 받게 된다.

 교사들은 종교단체나 종교지도자들을 믿고 양심운동을 하게 되면 그들도 사람인지라 학교 측에서 부담스러워한다. 목사도 신부도 스님도 마찬가지였다.
 이 땅에서 자유를 실천하겠다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원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끝까지 직장에서 버텨낸 시인이나 작가가 없었다. 이에 유신정부는 권력을 통하여 회유하거나 협박하였다.
 소위 이름이나 꽤 알려진 문인들한테는 직장을 알선하여 변절케 했으며, 해외여행을 시키는 사례가 유신시대에 많았다. 여기서 이름을 굳이 거명하거나 직장까지 또렷하게 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이 글의 본질과는 엇나가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자유실천문인협회 회원으로서 「동아사태」에 서명했고 이름이 103인이 함께 신문, 그리고 「신동아」잡지에 연속 광고가 나오게 되었다. 이 이름을 가지고 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직능별로 나누어 시·도의 문인들을 가려내서 되자 나는 금시 그들한테 노출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집밖에 수시로 경찰이 서성댔고, 가택방문이나 일기장을 수거해 갔다. 그런가하면 아내한테 간접 압력을 행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학교 부근에 잠복하여 퇴근 후의 나의 뒤를 밟았다.

▲ 경기도 부천에서 천렵을 마치고 고은, 신경림씨등과 함께 찍은 사진

 더구나 나는 서울의 자유실천문인들 가운데 중책을 맡은 고은시인 신경림 시인 조태일 시인, 김주영, 이문구 형을 자주 불러 소래천에 천렵을 하거나 술타령을 하곤 했다. 이는 정보기관의 눈에 거슬리는 짓이었다.
 골수 유신반당의 괴수들이 나의 주변에 맴도는데 학교의 시선이나 정보기관의 곱잖은 여러 가지 압력이 가해졌다. 나는 이 사실을 이문구 형한테 은밀히 말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들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명단에서 뺄테니 간조나 보태주고 선생 모가지는 붙여나가야지요…….」

 그는 무척 근심하는 눈빛으로 위로하면서 처신을 당부했다. 고마운 배려였다. 이게 이문구 형의 인간적 됨됨이였다. 그는 언제나 인간적으로 처신했고 색다른 문장으로 살았다. 생김새는 거친 산도령처럼 생겼지만 착한 마음으로 이웃을 보살피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결국 학교에서 시달리고 정보기관의 사찰과 보이지 않는 압력에 서울을 벗어나야 할 궁리를 했다. 그러나 내가 이문구 일당이 되었고 자유 투사로서 직장에서 쫓겨나야 할 한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이 신상에 대하여 침소봉대하거나 애국투사연 하는 처신을 극도로 자제했다. 내가 유명한 소설가나 시인도 아니었다. 아무나 잡문을 쓰면 수필가로서 대우받던 시대였으니 나의 초라한 문인의 모습이 사실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욱 나의 불이익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여러 차례의 가택수색, 수십 차례의 학교장의 하소연 속에 나는 은밀한 대책을 수립했다.

 시골로 가자. 거기 가면 나의 모습이 기관원들한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계획을 위해서는 일단 시골의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눈에 띄지 않는 벽지의 중학교를 지망할 생각을 했다.

▲ 서명자 명단에 필자의 이름도 들어있다


영동군으로 부임
 나는 아무도 모르게 충청북도에 가서 임용고시를 치렀다. 2학기에 결원이 생기는 다섯 명을 고르는 순위고사였다. 나는 실력은 없어도 시험운이 있어 공식적인 시험을 치르면 거의 늘 3등 안에 안착하곤 했다. 이날도 나는 2등으로 합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운좋은 결과로 나는 남들 앞에 교직을 떠나는 것으로 하여 사표를 냈다. 나는 내가 타의에 의해 학교를 떠나는 것을 극구 함구했다. 사직의 이유가 농사를 지으러 고향에 간다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의 아닌 거짓처신이었다. 나는 9월 1일자로 충북 영동군 용산면에 있는 용문중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발령 한 달 전에 나는 이미 학교 앞에 울도 담도 없는 슬레이트로 지은 방 3칸짜리 집을 구했다.
 텃밭도 다섯 평쯤 되었다. 이를 가꾸면서 자연을 벗하고 살았다. 번잡한 도시보다는 시골에 묻혀 지내고 싶었다. 이렇게 나를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림으로 시골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만일 이문구 형으로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공립학교로의 진출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집을 수색하고 나의 직장을 들락거리면서 내 신변을 괴롭게 하는 담당자들한테 나는 원망하지도 않았다.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그들의 임무도 매우 중요하다고 느꼈다.
 오늘날처럼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과 공권력을 적으로 간주하던 일이 나의 시대에는 없었다. 데모와 시위도 신사적이었다. 물론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은 도덕성을 바탕에 두었고, 국가관도 뚜렷했다.
 해방 후 우리는 학교에서 「우리의 맹세」를 제창하였고 5.16 군사혁명 후에는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였던 세대. 그러니 자연 국가와 민족이 나보다 먼저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나는 마당에 여섯 마리의 햇병아리도 사다가 키웠다. 물론 강아지도 사왔다.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와 나 개와 닭이 이제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들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돌배나무도 서재 앞에 올망졸망 정다워 보였다.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게 나는 소망이었다. 이러한 삶의 흔적을 글에 담아냈다. 월간 「충청문예」에 연재 에세이로 시작하여 1년간 써냈다. 이를 모아 「소달구지에 실은 청춘」이라는 수필집을 출간했다.
 조그마한 시골학교 국어교사가 수필집을 출판했다고 하여 손일성 교장선생님은 숙직실 뜨락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셨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필집을 1톤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군내 학교 도서관에 납품하여 주셨다.

이렇게 교장 선생님께서 나를 도와주심은 당신의 인간적 됨됨이나 덕이 있어 그랬다. 그러나 나 자신도 교사로서, 하급자로서 개인적으로 신앙적으로 교장, 교감 선생님과 동료들 더 나아가 동료들에게  섬김의 자세로 임했던 것이 작용했다고 회고된다.
 이곳 산촌으로 부임한 나는 교사로서의 나를 낮추고 겸손과 인간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것이 씨앗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영동군 교육청 중등과장 김영태 장학사님의 배려로 군내에서 수필가 교사로서 사랑을 받았다.
 이어 국어과 교사로서 홍정돌 장학관은 나의 수업을 참관하시고 강평을 잘 해주셨다. 이렇게 잘한 수업은 처음이라는 극찬이었다.
 하기야 서울 근교의 고교 교사로 숱한 장학지도와 감시 하에서 익힌 수업 방법은 시골 중학교에서 보기에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공개수업, 장학지도로 인하여 또한 작가로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충청일보 문화면에 6개월 동안 칼럼을 써댔다. 그러니 지명도가 넓어졌다. 그리고 학생지도와 상담에도 열정을 다했다. 이렇게 에너지와 삶의 자세가 교육위원회에까지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채 1년이 못돼 나는 청원군 청주근교에 있는 내수중학교에 전근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내수중학교에서 오전근무, 오후에는 충북교육위원회 중등교육과에 근무하는 파견교사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이 작은 중학교에서 1년 만에 청주로 옮겨가는 나의 발길을 남들은 부러워했다. 그러나 나의 남다른 노력과 실력을 동료들은 잘 몰랐다.
 
아내의 봉사도 한 몫
 나는 15명의 교사가 근무하는 교무실에 아내가 손으로 칼국수를 만들어 점심시간에 가져오곤 했다. 거의 매일. 이렇게 15명이 단란하게 무료로 먹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서정이었다.
 그것은 아내의 노고와 사랑이 없이 할 수 없는 일. 나의 아내와 딸, 강아지 이렇게 셋이는 점심시간에 와서 칼국수 양푼을 전달하곤 사라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아내의 봉사와 나의 열정과 더불어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마침내 영전으로 이어졌다.
 
 내가 청주에 가서 했던 일은 시내 고등학교 문예반 학생들을 모았다. 서남교회 교육관에서 오전에 예배하고 오후에 문예창작 교실을 열었다. 이는 선교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나의 이러한 행위에 대한 소문은 청주 문인들 귀에 흘러들어갔다. 그들에게 좋을 리가 없다. 객지에 굴러 들어온 수필가가 영동에서 1년 만에 청주에 온 것도 배가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상부기관 중등교육과 교육감 그늘에 섰던 나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더욱이 나는 내륙문학동인회 중심 멤버에 강준형 양채영 강우진 김효동과 친하게 지냈으니 타 동인들은 자연 나를 경원시 했다.
 그러한 까닭이 작용하였던지 연합통신 j기자가 나에 대한 기사를 본사에 올렸다. 기사의 제목이 「어지러운 충북교육풍토」6단 기사였다.

 이 6단 연합통신은 이튿날 조간 한국일보 지방판 소식에 나왔다. k기자는 소설가로서 연합통신을 주축으로 기사를 올렸다.

진천의 모 여고 교장이 학생들 앞에서 체육교사 뺨대기 때린 일, 보은 어느 초등학교 교감이 마작하다 발견된 사건, 그리고 나, 이재인이 타도에서 전입하여 1년 만에 변칙, 청주로 왔다는 사건.

사실 그들에게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4~5년 돼야 시골에서 청원군이나 청주시에 옮겨 올 수 있는데 나는 1년 만에 들어온 것이다.

 교육감이 나를 데려간 것은 예외규정에 적용하여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러니 타인들은 그 예외규정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간 학교 행정에 문서의 규정, 그리고 학습지도와 상담에 관한 도서를 남모르게 습득하여 그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의 그리운 문우들
 지금 돌이켜보면 성공했던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축적된 노력과 배경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밝혀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뿌린 대로 거두고 심은 대로 얻는 게 자연법칙이다.

 내가 청주에서 가까이 지냈던 문인들을 꼽아보면 몇 사람이 있다.

 충북대 김영삼, 김재홍, 이융조, 그리고 박영대 화백, 윤지용 시인, 강준희 강우진 강준형, 강성일 임승빈 선생, 설임윤 이재준 조무주 기자, 김춘길 부장과 이상훈 국장이었다.

 이외 반숙자 반인섭 김효동 시인 한현구 교육장 등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분들이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