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 ‘더 글로리’가 특별한 이유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 ‘더 글로리’가 특별한 이유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01.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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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스틸컷

김은숙 작가의 신작 드라마 <더 글로리>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12월 30일 공개 직후 1월 첫째 주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TV(비영어) 부문 1위에 올랐다. 무엇이 특별했을까?

이 작품은 학교폭력 생존자 동은(송혜교 분)의 17년에 걸친 치밀한 복수극을 그린다. 학교폭력의 주동자였던 연진(임지연 분)이 ‘그늘 한 점 없는’ 탄탄대로를 걸어 어디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삶에 이를 동안, 동은은 해가 뜨지 않는 극야(極夜)와 같은 시간 속에서 오직 복수만을 위해 설계한 삶을 살았다. 드라마에는 동은 외에도 가정폭력 피해자인 현남(염혜란 분), 아버지를 죽인 살인마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받으며 트라우마에 시달려 온 여정(이도현 분) 등이 등장해 피해자들 간의 입체적인 연대와 공모를 보여준다.

현재 총 16화 중 8화가 공개됐으며, 나머지 분량은 시즌 2로 오는 3월 공개될 예정이다. 따라서 아직 확실한 평가를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이미 <더 글로리>는 색다르다. 보통 미디어에 등장하는 복수극은 통쾌함을 선사하기 위해 ‘막장’ 전개로 치닫기 쉬운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동은의 복수는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싸우는 바둑처럼 서늘하고 진중하다. 일각에서는 여타 복수극에 비하면 자극적인 쾌감이 덜해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동은의 수(手)가 하나씩 공개될수록 이 바둑판 위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그림은 사회적 약자로서 보호해 주는 사람도, 시스템도 없던 상황에서 사적 복수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한 어린 동은의 내면이다. 복수의 과정에서 얼마나 센 행위를 했는가보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방점이 찍힌다.

‘로코 장인’이라 불리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지만 남자 주인공인 여정과의 로맨스도 아주 옅은 농도로 그려진다. 여정의 사연을 모르는 동은은 병원장의 아들인 그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을 거라 생각해 7~8년이나 곁을 주지 않고, “난 왕자님이 필요한 게 아니라 칼춤 추는 망나니가 필요하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한다. 자신을 괴롭혀 온 살인마에 대한 복수심을 억누르며 살아 왔던 여정은 처음에는 “(복수를) 멈출 생각은 없는 거냐”, “복수가 끝난 자리는 폐허일 것”이라며 일반적인 제3자와 비슷한 반응을 하지만, 동은의 온몸에 남은 폭력의 흔적을 보고 나서는 “나도 바닥을 기어 봐서 그 분노의 무게를 안다”며 조력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이들의 깊은 교감은 여정이 마음을 닫고 살아 온 동은에게 쉽사리 세상이 정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얹는 대신, 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향후 동은의 복수를 돕는 과정에서 여정도 점차 자신을 괴롭혀 온 트라우마와 직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동은은 각자의 복수를 위해 손잡은 ‘매 맞고 살지만 명랑한’ 여자 현남과 이해하고 의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이를 “피해자들의 연대”라고 표현한다. 동은과 현남, 여정이 인간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출발점은 오직 과거의 고통이다. 외면하고 살아 왔든, 복수를 다짐해 왔든 삶의 서사가 다른 국면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계속 폭력의 경험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극이라는 형식에 폭력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해자들의 내적 투쟁을 담은 이 드라마는 폭력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짙은 어둠을 드리우는지 보여주고, 피해자가 존엄을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끈질기게 묻는다. 김은숙 작가는 제작발표회 당시 제목의 의미에 대해 “피해자분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현실적인 보상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원했다. 세속에 찌든 나로서는 진심 어린 사과로 얻어지는 게 뭘까(라고 생각했다). (…) 얻는 게 아니라 되찾고자 하는 거다. 폭력의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잃게 된다. 인간의 존엄이나 명예, 영광 같은 것들”이라며 이번 드라마는 그 원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람들은 피해자를 위로하고자 “다 잊고 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다”와 같은 말을 건네곤 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겪었을 자책에 무관심한 사회에서 이런 태도는 그들을 더욱 외롭게 만드는 또 다른 무관심이 될 수 있다. 학교폭력 생존자들이 직접 쓴 에세이 『여섯 개의 폭력』에서는 “이유 없는 고통은 참기 어려운 것이라 인간은 고통을 당하면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려고 한다. (…) 그 끝에는 내가 나인 것이 문제가 된다”며 폭력의 경험이 자책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내가 나인 것이 문제인데, 어떻게 그걸 잊고 잘 살 수 있겠는가.

머리말을 쓴 은유 작가는 이 책을 ‘붕괴의 서사’이자 학교에 남아 있는 어린 자신에게 다가가는 ‘복구의 서사’라고 표현했다. 상처 입은 영혼의 ‘복구’를 위해서는 결국 그 순간으로 돌아가 서사를 재구성해야 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네 탓이 아니라 말해 줄 존재가 필요하다. 어른이 되어 단단해진 자신이든, 고통을 나눠 지려는 주변 사람이든 말이다. <더 글로리>는 그렇게 상처가 제대로 봉합되고 아무는 시간을 존중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드문 이야기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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