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에게 듣다] 박준 시인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더 많아지길”
[명사에게 듣다] 박준 시인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더 많아지길”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2.01.18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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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 [사진=최현식 PD]

책 『계절 산문』에서 박준은 시인(詩人)이기 전에 행인(行人)이다. 책 속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그는 “가야 할 데가 없어도 가야 할 데가 있는 것처럼” 걷는다.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두리번거리고 서성거리는, 시인이 주인공인 한 편의 로드무비와 같은 책. 그러니까 이 책은 박준의 발자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 발자국에는 외롭고 쓸쓸하지만, 생(生)을 잃지 말자는 시인의 간곡한 부탁이 정갈하게 담겨 있다. 어쩌면 계절이 지나간 흔적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박준의 발자국과 그가 견뎌낸 사계절의 흔적이 아스라하게 찍힌 책. 『계절 산문』 출간 기념 인터뷰를 위해 지난 10일 파주에 위치한 달 출판사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Q. 근황이 궁금하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매일 밤 라디오 생방송을 한다. 요즘 그게 가장 시간을 많이 쓰는 일이다.”

Q. 두 번째 산문집이다. 첫 번째 산문집을 쓸 때와는 어떤 점이 달랐나.

“시집이 섬이라면 산문집은 그 섬으로 가기 위한 다리 같은 거다. 근데 산문집을 꼭 ‘연결’이라는 기능적인 측면에만 두지 말고, 좀 아름답게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금문교나 출렁다리처럼 우리가 다리만 보러 갈 수도 있는 거니까. 또 첫 번째 산문집이 24만 부 정도 팔렸는데, 부담이 좀 있었다. 그러니까 독자분들이 나의 산문에 대해서 기대하는 지점이 있을 텐데, ‘내가 그 기대를 배신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과 또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 산문집의 정서를 유지하되 좀 변주를 해서 독자분들에게 ‘이 사람은 이런 글도 쓸 수 있네’와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또 많은 분이 첫 번째 산문집보다 더 솔직해지고, 나라는 사람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해줬다.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그때보다는 좀 편한 마음 상태에서 이 책을 쓰지 않았나 싶다.”

Q. 기억에 남는 독자의 반응이 있나.

“어떤 독자분이 ‘책을 읽는 시간보다 책의 문장 언저리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다. 그것은 우리가 바다 앞에서 혹은 노을 앞에서 멍해지는 순간과 비슷하다.’ 이런 아름다운 후기를 남겨주셨다. 우리가 바다를 보러 가지만, 사실 바다를 보는 시간보다 그 주변을 맴돌거나 머무는 시간이 더 길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문장을 읽는 시간보다 문장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시간이 더 길다고 해주신 것 같다. 그러니까 글이 어렵지는 않지만,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가는 책이 있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작업이 그것이다. 쉬운 문장이지만 여백이나 생각할 지점이 많은 문장. 그런 문장을 쓰고 싶다.”

Q.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편지였으면 좋겠다. 내가 받아도 되는 편지였으면 좋겠다.”

Q. 제목이 대개 문장형이 많았는데, 이번엔 명사형이다.

“1월부터 12월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을 묶어 놓은 책이니까. 이 제목 외에는 전체 원고를 아우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뭔가 몽글몽글하고 달달한 제목을 붙여서 이 책을 눈에 확 띄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담백한 제목을 붙여서 책 내용을 배신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Q. 경어체와 청유형으로 쓰인 글들이 눈에 띈다.

“내 말투가 원래 그렇다. 좀 느끼하다. (웃음) 내가 겪은 일들을 가상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느낌의 글들이라 조금 설명적이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문장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Q. 전반적으로 ‘기다림’에 관한 책처럼 느껴진다.

“뭉근한 기다림이라고 할까. 가령 나는 여름에 매실주를 담그면서 ‘이 매실주를 겨울에 누구랑 마시게 될까?’ ‘내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과 마시게 되진 않을까?’ 등의 생각을 한다. 그럼 그 매실주를 담그는 행위 자체가 기다림이 되는 거다. 달력에 ‘매실주 마시는 날’이라고 적어놓지만, 사실 그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과, 어떤 얘기를 하면서 이걸 마시게 될까를 기다린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Q. “시작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에게 그동안 익숙했던 시간과 공간을 얼마쯤 비우고 내어주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당신이 말하는 ‘시작’에는 ‘돌아본다’가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문을 열고 나갈 때, 문을 안으로 당기는 공간을 따로 잰다. 이 공간이 없으면 문을 당겨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론 내가 나가는 방향으로 문을 밀어도 되는데, 그건 타인의 공간을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다. 연인 관계도 똑같다. 누구를 만날 때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얼마간 비워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나에게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줘야 해’라고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 나는 라면에 계란을 절대 넣지 않는데, 그 사람을 만나고 라면에 계란을 넣을 수도 있다. 시작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얼마쯤 비우고 가는 게 좋은 시작이다.”

Q. ‘장마를 기다리는 마음’이나 ‘다시 노동에게’ 등의 글들은 각각 동물권과 노동권에 대한 글처럼 보인다. 시인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쓰는구나 싶었다.

“간혹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글을 쓸 때가 있다. 그때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내가 이 메시지를 말할 만한 자격이 있나?’라는 거고, 두 번째는 ‘이 글이 구호에 그치지는 않을까?’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도움이 될 말한 메시지를 최대한 문학적인 형식으로 녹여내는 것이다.”

Q.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야”라는 민박집 할머니의 말에 묘한 위로를 느꼈다고 했다.

“가령 친구가 전화 와서 ‘나 오늘 바빠서 한 끼도 못 먹었어’라고 하면, 그게 나한테 밥 사달라는 말은 아니지 않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문장의 호응 관계에서 벗어나는 어떤 위로의 말을 던질 수 있다. 민박집 할머니의 말처럼, 저녁은 나처럼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시간인 거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참된 언어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Q.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더 많았으면 합니다. (중략) 이렇듯 좋은 것들과 함께라면 저는 ‘은근슬쩍’ 스스로를 좋아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라고 적었는데, 왜 ‘은근슬쩍’이라는 말을 붙였나.

“평소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은 게 나만 그런가? (웃음) 내가 나인 게 싫고, 오늘 내가 또 나 했고… 다들 그러면서 살아갈 텐데, 다만 내가 마음에 드는 순간들이 있다. 나 오늘 좀 괜찮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순간이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났을 때 혹은 산을 좋아하면 등산하는 내 모습이 싫지 않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반려동물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싫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끊임없이 만들 때,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나온다. 거창한 게 아니라도 좋다. 사소한 거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할 때, 그 때가 비로소 내가 나를 은근슬쩍 좋아하는 순간이 아닐까.”

Q. 요즘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뭔가.

“중독자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위스키다. (웃음) 사실 술 자체보다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어디서, 누구랑, 어떤 음식에 이 술을 먹어야지, 이렇게 기획한다. 그냥 퇴근하고 집 가서 한잔하는 게 행복한 건 아니다. 그러니까 술 마시는 행위에도 서사가 필요하다.”

Q. ‘벗’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친구들에게 잘 연락하는 편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잘 하지 않는다.”

Q. 인간관계는 괜찮나.

“당연히 마음을 나누는 친구는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은 한 친구를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만나고, 네 번 정도는 통화해야 그 관계에서 안온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게 1년에 두 번 정도다.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만나는 게 좋다. 나에게도 분명 사람에 대한 소유욕이 있지만, 그게 비교적 쉽게 충족된다. 연비가 좋다고 해야 할까. 어제도 한 친구를 만났는데, 정말 친한 친구지만 그 친구를 지난해 한 번 보고 이번에 처음 봤다. 근데 친구는 이런 만남의 주기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 주기를 모든 관계에 적용할 수는 없다. 조금 더 자주 만나야 하는 관계라면 3개월에 한 번 정도 본다. 그리고 4명 이상 있는 자리에는 잘 안 간다. 2명이 가장 좋다.”

Q. 이번 책에 실린 글들 가운데 가장 추천하고 싶은 글이 있나.

“‘세상 끝 등대 4’라는 제목의 글이다. ‘불행이 길도 없이 달려올 때 / 우리는 서로의 눈을 가려주었지’라는 짧은 글인데, 이 산문집에 수록된 원고 중 가장 늦게 썼다. 내가 평소 생각하는 사람의 역할도 이 글에 담겨 있다. 불행이라는 것은 정말 갑자기 튀어나오는데, 우리가 소중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 불행을 몸을 던져서 막아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눈을 가려주고 불행을 함께 맞닥뜨려 주는 거다. 그러니까 상대가 눈을 뜨면 내 손바닥을 보는데, 그 감각이 얼마나 안온한가. 서로의 눈을 가려주면서 사는 것이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위로라고 생각한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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