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마음을 다해 대충하는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마음을 다해 대충하는
  • 스미레
  • 승인 2021.11.1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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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억울하다. 나는 실전에 약하다. 예민한 성정 탓에 큰일 앞에선 곧잘 미끄러진다. 잠을 설치고 소화가 안 됨은 물론, 잘하던 것도 못 하고 아는 것도 틀렸다. ‘수능 1교시’가 그 예다. 나는 언어 영역을 가장 잘하던 학생이었다. 수능 코 앞인 10월 모의고사까지,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긴장하고 걱정하느라 실전에 쓸 에너지를 모두 끌어다 써서일까, 수능 날 아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온몸이 얼어붙어 1교시 언어 영역 답안지를 주루룩 밀려 쓰고 말았다. 2교시는 어떻게 치렀는지, 점심은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남들은 졸려 죽겠다는 3교시에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던 것 같다.

성적표를 받고는 웃음만 나왔다. 언어 영역 점수가 가장 엉망이었다. ‘될 대로 되라지’ 심정으로 본 과탐보다도 못한 점수였다. ‘콰이어트’의 저자 수전 케인도 비슷한 경험이 있단다. 어린 시절, 피겨스케이팅 시합을 앞둔 그녀는 긴장과 압박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연습 때는 잘만 했는데 시합 날엔 자꾸 넘어졌다. 그토록 자신 있고 좋아했건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유명 스케이터의 인터뷰에서 찾았다. “경기 전의 긴장감 덕분에 금메달을 따는 데 필요한 아드레날린이 분출됐어요!” 이에 대한 수전 케인의 소회는 이렇다. ‘그 선수의 긴장은 그저 힘을 북돋워 줄 정도의 강도였지만, 내 긴장감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했다.’ 둘은 그렇게나 달랐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에도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부분마취로 제왕절개를 했는데, 얼마나 긴장했던지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를 낳고 아주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껏 긴장과 각성을 피부처럼 두르고 살아왔구나, 졸린 데 잘 수 없던 밤에 든 자각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내 속이 어떻게 닳아가는지, 아이를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을지는 따져보지 못했다.

나처럼 긴장도와 자신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은 당신이라면, 잠시 생각해봐야 한다.‘육아’자체가 힘든 것인지, 긴장과 초조에 사로잡힌 내 마음 때문에 힘든 것인지. 그런 압박감에 대응하는 에너지만 아껴도 육아는 훨씬 편해진다. 가볍고 편안한 마음을 갖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수능 날 답지를 밀려 쓴 나, 파김치 엄마였던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걸 몰랐을 뿐.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삽화가로 유명한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집 제목이다. 이 묘한 제목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는 열심히 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면 '대충한다' 고 바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대충한 게 더 나은 사람도 있답니다. 저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지 않을까 해요. 저는 반쯤 놀이 기분으로 그린 그림이 마음이 들거든요.”

맞다. 간결한 선과 면으로 그린 그의 그림 몇 점만 봐도 금세 ‘대충’ 보다는‘마음을 다해’에 힘이 실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대충’,그러니까 마음을 다한 대충이란 절실함과 무심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적절히 힘을 빼고 거리를 조정해야만 가능한 일. 차라리‘있는 힘껏 열심히!’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키우며 매일 시험대 위에 올라선 느낌이었다. 특히 시어른들 오시는 날, 영유아 검진 날, 동네 엄마들 만나는 날이면 수능 날 아침처럼 몸과 마음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모두가 자신을 채찍질하며 뛰어갈 때, 몇몇은 그마저도 웃으면서 할 때, 나는 길을 잃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잘 해낼 줄 알았고,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는 건 별로 없었다. 뭔가를 가르치려는 속셈이 섞이면 아이가 알아챘던 건 아마 내 눈빛이나 숨소리부터 달라졌기 때문일 테다. 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 했고, 즐기기 위해선 놀아야 했다. 산보를 나서고 나란히 서서 요리하고. 그마저도 힘들면 노래를 불러주고 가위바위보 하며 놀아줬다. 아이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집을 살피고 마당을 돌봤다. 그건 엄마표 놀이가 아니라‘엄마가 즐거운 놀이’였다.

억지로 애쓰지 않으니 나 역시 일상이 즐거워졌고 오늘은 아이와 뭘 할까 설레기도 했다. 껴안고 뒹굴기만 해도 좋은 날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게워낼 때마다 스모그 낀 듯 무겁고 우중충하던 아이와의 시간이 가뿐하고 투명해졌다.

돌아보니 놀이가 별건가 싶다. 시시하면 어떤가, 재밌으면 그만인데. ‘엄마표 놀이’, ‘○살 아이 놀이’류의 놀이책을 하나 골라 그날그날 하나씩 해보면 좋겠다. 잘만 활용하면 책에 나온 놀이를 다 해보기도 전에 아이가 자라 있을 터.

미즈마루 씨의 말처럼 뭐든‘놀이 기분’으로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육아의 8할은 놀이다. 눈 닫고, 귀 막고 딱 1주일만 막, 막! 놀아보자. 놀다가 문득 더 많이 해줘야 한다는 불안, 더 잘하고 싶다는 압박이 들 때면‘이것은 놀이일 뿐’을 떠올리며.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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