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연인과 자주 갔던 카페 근처를 우연히 지나갈 때, 우리는 이상한 감정에 빠진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시간으로 잠시 되돌아간다. 그때의 기억에 찰나적으로나마 접속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간은 시간을 소환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공간에 가면 과거의 시간과 기억, 사람이 내 옆에 잠시 머무른다.
영화에서 공간이 갖는 의미도 대단히 중요하다. 영화 연출에서 공간을 중요한 테마로 삼아온 김종관 감독은 <독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익숙하게 보아온 공간을 영화라는 무대 위에 올리는 작업에 재미를 느낀다”며 “내가 자주 갔던 공간에 다양한 인물과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질 때 무척 즐겁다”고 말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가 최근에 낸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섬앤섬) 역시 영화 속 공간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책이다. 이 책에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앉았던 대웅전 툇마루가 있고, <북촌방향>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카페 소설(小說)이 있으며, <친구>에 등장했던 국제시장과 남포동 일대의 골목길이 있다.
이렇게만 말하면, 어떤 독자는 이 책이 영화 속 공간들의 사사로운 정취나 풍광 따위를 그러모은 가벼운 여행 에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에는 한국영화의 30년사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책에는 199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코리아 뉴 시네마’ 시대의 영화부터, 현재까지의 영화들이 총 망라돼 있다.
진소천 철로변에 가면 나 역시 거기서 소리를 칠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돌아갈 것이라고, 나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그 누가 그러고 싶지 않겠냐고 외치고 싶어진다. 이 허망한 세상에서 더 이상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영화가 만든 허상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진실의 공간임을 알게 된다. - 영화 <박하사탕>, 227쪽
특히 오 평론가는 <실미도> <지슬> <남부군> <택시 운전사> <박하사탕> 등 한국 현대사의 상처와 아픔이 기록된 작품들을 통해 공간이 갖는 역사성과 영화적 의미 등을 탐문한다. 단순한 텍스트 분석을 넘어서는 ‘현장 영화 비평’인 것이다. 그는 “진부하지만 사람은 길을 다니며 배운다는 말의 의미가 이 책에 담겨져 있다”고 말했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